열쇠는 어디에

4. 아테네에서의 첫날

by 지안

짐을 찾아 아테네 공항 입국장을 빠져나온 시간은 새벽 1시가 넘을 무렵이었다.


다행히 푸른 남방에 검은 진바지를 입은 그리스 남자가 고개를 뺀 채 영문 이름을 띄운 핸드폰을 들고 입국장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미리 예약해 둔 픽업 택시 기사다. 이런 고가의 서비스는 어지간해서는 잘 이용하지 않는데, 새벽 1시에 낯선 나라 땅에 내릴 때는 방법이 없다. 한 끼를 굶더라도 서비스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그는 반갑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이름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 애매한 시간에 아테네 공항 입국장에 아시아인은 우리 일행뿐이다.


"어디서 왔어?"

그가 내 가방을 채가며 묻는다.

"코리아."

그를 만나 기쁜 내가 말한다. 애국가라도 한 번 부를 판이다. 이번 여행은 어쩐지 잘 풀려갈 것 같다.

"아, 노쓰 코리아에서 왔구나. 반가워."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아냐, 우리는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어."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강제로 북한 주민이 될 생각은 없다. 아마 이 기사님은 자신이 남, 북으로 나뉜 한국의 상황을 알고 있다는 티를 내고 싶었던 것이리라.

"아, 그래그래, 노쓰 코리아와 사우스 코리아가 다르다는 건 나도 알아."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가방을 싣고 목적지를 확인한 후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노쓰 코리아는 어때? 거긴 좋아?"

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요, 드라이버.

"미안해. 나도 노쓰 코리아에 대해서는 잘 몰라. 우린 그렇고 그런 사이야."

"아, 아시아는 너무 어려워."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말을 내뱉고 기사가 앞을 응시했다.




아시아가 어려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외면하시면 안 된다. 그리스는 아시아에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화 속 이야기다.


터키의 남쪽, 현재 레바논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를 아우르는 땅에 '자줏빛의 나라'라는 뜻의 페니키아가 있었다.(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라고 불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타이트인라고 불렀다. 현대 학자들은 '시리아-히타이트인, '신히타이트인'같은 여러 말로 이들을 부른다) 이 바다에 접한 도시국가는 서양과 동양의 문명이 만나는 장소였다.


페니키아 인들은 알파벳의 기원이 되는 표음문자를 만들었고, 조개에서 추출한 염료로 천을 자줏빛으로 염색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이렇게 물들인 옷감들은 귀족이나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19세기 화학염료가 개발될 때까지 엄청난 값으로 거래되었다.


고고학적 이야기는 접어두고 신화의 세계로 돌아가자.


현대의 지도위에 페니키아를 그려보았다. 붉고 작은 섬이 크레타다.


바로 이 페니키아에 에우로파(Europa)라는 공주가 있었다(혹은 에우로페). 족보를 따져 올라가면 에우로파는 포세이돈의 손녀 뻘이 된다 (강의 신의 딸, 이오의 증손녀라는 견해도 있는데, 뭐가 됐든 물과 관련되어 있다). 어느 날 적당한 여자가 없나 땅을 굽어 보고 있던 제우스가 에우로파에게 한눈에 반하게 된다. 제우스는 입에서 장미향을 내뿜는 온순한 황소로 변한 뒤 그녀를 등에 태우고 바다를 건너 크레타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제우스는 그녀와 동침하고, 미노스와 사르페돈, 라다만튀스라는 아들을 낳는다.


에우로파에게는 오빠가 셋 있었는데, 아버지는 딸을 찾기 위해 아들들을 보내면서, 동생을 찾기 전에는 집 근처에 얼씬할 생각도 말라고 단단히 이른다. 그것으로 모자라 자신의 부인과 포세이돈의 아들인 타소스까지 딸려 보낸다. 쉽게 딸을 찾기 어렵다는 예감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제우스에 의해 납치된 에우로파가 쉽게 눈에 띌 리는 없었다. 동생을 찾지 못하고 돌아간들 아버지에게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아들들은 각자 살 곳을 찾는다. 포이닉스라는 아들은 포이니케에 정착했고, 킬릭스라는 아들은 킬리키아에 정착한다. 카드모스와 어머니 텔레팟사는 트라케에 정착한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 텔레팟사가 죽은 후 카드모스는 델포이로 가서 동생의 행방에 대해 묻는다. 도대체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 동생의 안부도 궁금했겠고, 어머니도 돌아가신 마당에 이제는 정말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오래되고 간절한 질문에 대한 신탁은 이랬다.


에우로페 때문에 애쓰지 말고 암소 한 마리를 길라잡이로 삼되 그 암소가 지쳐 쓰러지는 곳에 도시를 세우라.


약에 들떠 지껄인 헛소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카드모스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접고 신탁의 내용대로 암소가 쓰러진 곳에 도시를 세우게 되는데, 그곳이 테베다. (오이디푸스의 슬픈 이야기로 유명한 그 테베 맞다)


카드모스는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그 결혼식에 에우로파도 참석했다고 하니 그럭저럭 해피엔딩인 건가) 아이도 낳고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그리스에 문자를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티치아노의 [에우로페의 납치] 메롱~ 하는 듯한 저 소 표정을 좀 보라지.....


현대의 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동방의 문명이 서쪽으로 전해진 과정으로 해석한다. 신화란 모름지기 그런 용도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실물의 곰과 호랑이가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어떤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 곰도 호랑이도 불려 온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에우로파, 즉 Europa는 유럽이란 단어의 어원이 된다. 이 전설에 따르자면 문명은 동에서 크레타를 거쳐 그리스 본토로 유입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에우로파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제우스는 에우로파를 버리고 떠났다. 미안하긴 했는지 에우로파에게 목걸이를 주고 갔다고 전해진다.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걸고 있으면 영원히 늙지 않는 목걸이라고 한다(자신의 미모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인지, 에우로파는 이 목걸이를 오빠 카드모스의 결혼 선물로 줘 버린다. 이후 이 목걸이는 테베 왕실의 가보로써 오이디푸스의 어머니 이오카스테에게로 이어진다).


버려지긴 했지만 에우로파는 어쨌든 제우스의 아이를 낳은 사람이다. 어지간한 인간이 멋대로 할 수 없다. 에우로페는 크레타의 통치자 아스테리오스의 아내가 되고, 아스테리오스는 그녀의 세 아들까지 모두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인다. 어렸을 때야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장성하고 나서는 아들끼리 사이가 좋았을 리가 없다. 다툼이 있은 후 크레타의 왕이 된 사람은 에우로파와 제우스의 아들 미노스다.


이 왕은 '미노스의 미궁'으로 유명해지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나를 북조선 사람으로 오해하긴 했지만, 택시 기사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저, 미안하지만 말이야..... 혹시 이 시간에 맥주를 좀 살 수 있을까? 숙소로 들어가서 한 잔 마시고 자고 싶은데 말이야."

이런 말도 안 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간절한 부탁에 그는 흔쾌히 "물론이지. 내가 좋은 그리스 맥주를 알고 있어."를 외쳤다. 그리고 어느 버스 정류장 옆 허술한 간이 상점에서 맥주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유쾌하고 멋진 그리스인이다.


약간의 팁을 쥔 그가 한바탕 인사를 하고 떠난 뒤, 우리는 주택가 한가운데 있는 숙소 앞에 커다란 여행 가방과 맥주를 담은 비닐봉지와 함께 남겨졌다. 새벽의 골목은 고요했다. 시간은 오전 2시를 향해가고 있었고(맥주를 사려고 길을 좀 돌았다) 아직 오늘의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비앤비를 통해 고른 숙소는 어제부터 예약이 되어 있었다. 새벽 비행기에서 내려 노숙을 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하루치 방 값을 더 계산한 것이다. 숙박 기간에 관해서는 몇 번이고 확인을 했고 집주인 쪽에서도 몇 번이고 '알았노라, 걱정하지 말라' 답 메일을 보내주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편지에 문을 여는 방법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도착하면 문 왼 편 화분 뒤에 열쇠 상자가 있을 것이다. X X X X 로 네 자리 숫자 번호를 맞추고 그 안에서 열쇠를 찾아라.

카드모스가 델포이에서 신탁을 들은 후 기분이 이랬을 것이다. 문 왼 편 화분은 무엇이고, 열쇠 상자는 또 무엇인가. 그리스인이여, 이것이 최선인가? 그대들은 버튼식 도어록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투덜대고 있을 수는 없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


대충 이렇게 생긴 열쇠 상자가 붙어 있었다. 이게 보이냐고....


거대한 철문 귀퉁이에 말라빠진, 예전에는 살아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식물의 잔해가 담긴 화분 두 개가 보였다. 뒤를 보니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색 열쇠 모양 상자가 걸려 있다. 옳거니. 이제 주어진 4가지 숫자만 조합하면 된다.

그러나 19시간 비행을 막 마친, 흐릿하게 노안이 진행되고 있는 눈에 새끼손톱 반보다 작은 숫자가 보일 리가 없다. 문명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핸드폰의 손전등을 켰다. 이런.... 은색 숫자는 밝은 불빛을 그대로 튕겨 보낸다. 도무지 숫자를 구분할 수가 없다.


우아하게 해결하긴 다 틀렸다. 낑낑거리며 화분을 치우고 몸을 잔뜩 구부리고 열쇠 상자를 눈앞에 갖다 댄다.

보이는 것 반, 촉감 반으로 더듬더듬 숫자를 맞춰나간다.


딸깍.


이윽고 상자가 열렸다.


그런데...... 없다.


아무것도 없다.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이야? 진짜야? 집 못 들어가는 거야? 우리 이제 노숙이야?


열쇠 상자를 툭툭 치고, 안 쪽에 뭐가 있는 것이 아닌가 손가락을 집어넣어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없다. 열쇠 상자를 열기 위해 씨름한 지 25분이 지났다. 그런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너무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동응답기만 대답한다. 게다가 알 수 없는 그리스말이 빠르게 흘러나온다. 뭔가 숫자인 것도 같고, 다른 이름이 들린 것도 같다. 시간은 벌써 2시 반. 어쩌지? 이 낯선 그리스 땅에서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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