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여행 첫날

6. 아크로 폴리스에 가기 위해서

by 지안

눈을 뜨니 환한 창 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저만치 던져두었던 이불을 끌어 덮으며 시계를 보니 새벽 5시도 안 된 시간이다. 너무 이르다. 하지만 더 이상 잘 수 없다는 것은 ‘지혜의 여신’ 같은 분이 말해주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오늘은 아테네 시내 반나절 투어를 예약해 두었고, 그래서 8시까지 아크로폴리스 역에 도착해야 한다. 다리가 튼튼한 가이드와 함께 아크로폴리스와 아레오파고스, 필로파포스 언덕 등을 둘러보게 될 것이다(많이 걷게 될 테니 편한 신발을 준비하라는 당부사항이 있었다). 여행지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현지 투어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그러니까 지금 나 같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전에 대략적인 그리스 역사에 대해 알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쓸데없이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면 더더욱 그렇다. 기내에서 읽다만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를 펼쳤다. 뭔가 읽어서 투어에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고, 그전에 잠이 들어 버려도 고마울 것 같았다. 한두 시간쯤 더 잘 수 있다면 하루 일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스 각지에 폴리스들이 성립하고, 이탈리아나 시칠리아처럼 그리스와 떨어진 곳까지 가서 식민 활동을 벌인 시기는 대략 기원전 8세기경이었다고 한다. 그 이전 문명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증거만 발굴될 뿐 1차 사료로 남은 것이 없다.


크레타 섬을 시작으로 태어난 미노스,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6-12세기경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소위 ‘도리스인의 이동’이라고 불리는 가설이다. 정확히 어떤 민족이었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온 것인지, 과연 그런 일이 진짜 일어났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브이 로그도 없고, 트위터도 없는 시절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청동을 주로 사용하던 미케네 문명이 쇠락하고, 갑자기 철을 사용한 흔적들이 나타나는 이 시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철을 사용하는 다른 민족’이 그리스로 유입됐다고 보는 것이 가장 편하고 그럴듯하다.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기둥들이 바닥에 놓여 있다. 양머리처럼 달린 기둥은 이오니아식 기둥이라고 가이드가 알려줬다.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가 끝없이 이어지는 신통기 뒷부분, 번역가의 해설 속에 이 시기에 관해 말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조지프 캠벨이나 카를 케레니 등 신화학자들은 그리스 신화를 모계 중심 사회가 부계 중심 사회로 옮겨가면서 형성된 것으로 본다.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 신화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를 지닌 아카이아 족이나 이오니아 족 그리고 도리아 족 등 인도 유럽 어족이 평화롭던 모계 중심의 그리스 반도를 정복하면서 전개된 것으로, 가부장제를 받쳐주는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그리스 신화 속 여신이나 여성상은 강력한 아버지 제우스 신을 정점으로 한 가부장제에 의해 많은 점에서 왜곡되어 왔다.

제우스의 정실부인 헤라는 아카이아 족 등을 비롯한 인도 유럽 어족들이 남하하기 전에는 원래 그리스 반도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모든 신들을 아우르는 고결하고 위대한 여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서는 그녀는 제우스의 아내가 되어 한낱 가장의 수호신으로 전락한다. 게다가 그녀는 위풍당당했던 여신의 모습은 잃어버리고 남편 제우스에게 꼼짝 못 하는 질투의 화신으로 그려져 있다. (신통기, 헤시오도스, 김원익 옮김, 민음사 P180)


아카이아 족이나 이오니아 족 그리고 도리아 족 등 인도 유럽 어족이 그리스 반도를 정복하게 되는 과정은 신화 속에서는 ‘헤라클레스의 모험’으로 정리되어 있다.


헤라클레스 (위키백과 펌)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알크메네의 아들로 테베에서 태어났다. 테베는 유로파의 오빠였던 카드모스가 세운 나라이고(그러니까 테베는 그리스 문명과는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알크메네는 테베의 귀족 암피트리온의 아내였다. 아마 늘 그렇듯(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알크메네의 미모가 너무 뛰어났었나 보다.


암피트리온이 전쟁에 나간 사이, 늘 말썽의 씨앗이 되는 제우스가 알크메네에게 접근한다. ‘소’로 변신하는 것보다 좀 더 비열한 방법을 사용했는데, 바로 전쟁에 나간 남편 ‘암피트리온’의 모습으로 변해 알크메네에게 간 것이다. 제우스는 하루 밤을 3일처럼 늘려 사랑을 나누면서 전쟁터에서 있었던 일도 생생하게 들려준다. 아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남편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다음날 드디어 전쟁터에서 돌아온 진짜 암피트리온이 아내를 찾지만, 아내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마음 상한 암피트리온이 볼멘소리를 하자 아내 알크메네는 ‘간밤에 같이 자 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오히려 짜증을 냈다. 기가 찬 암피트리온은 일단 아내의 간통을 의심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예언자를 찾아간다. 예언자는 알크메네가 제우스와 잠을 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정말이지 예언자는 모르는 것이 없다. 암피트리온은 운명을 받아들인다. 제우스가 그랬다는데 뭐 어쩌랴.


임신한 알크메네는 쌍둥이를 낳는다. 헤라클레스와 이피클레스다. 어쩌다 제우스가 또 사고를 친 것을 알게 된 헤라는 잔뜩 성이 나서 두 아이가 자고 있는 곳에 뱀 두 마리를 보낸다. 직접 하시면 될 걸, 꽤 복잡한 방법을 쓴다.


침대에서 뱀을 발견한 알크메네는 도와달라고 소리쳤는데, 그 소리에 잠에서 깬 헤라클레스는 뱀 두마리를 양손에 하나씩 꼭 쥐고 죽여버린다. 이 사건 이후, 암피트리온과 알크메네는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들, 이피클레스는 자신들의 아들임을 알아챘다고 한다.




이랬던 아기 헤라클레스는 커서 거인에다 힘이 세고, 대식가이며 기분 나쁘면 사람 죽이는 것쯤은 우습게 아는 어른이 된다. 그에게는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이따금 정신을 놔 버린다는 것이다. 신에 버금갈 만큼 힘이 좋은 사람이 미치면, 평범한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어느 햇살 좋은 날, 헤라클레스는 자기 자식들과 조카들(아피클레스의 자식들)을 몽땅 죽여버린다. 제정신이 돌아온 후 자신이 한 짓을 깨닫고 델포이로 간다. 그곳에서 티륀스의 왕에게 12년 동안 봉사하며 12가지 고역을 완수하라는 신탁을 받는다.


전설 속 12가지 고역을 현대어로 변환시켜 보면 이렇다. 도시에 출몰하는 짐승을 사냥하고(네메아의 사자), 샘을 정화하고(스튐팔로스의 새 떼), 강의 물길을 바꾸는(아우게이아스의 가축떼) 등의 일이다. 즉 인간이 한 곳에 정착하려는 시기에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다. 헤라클레스는 12가지 고역을 완수했고, 심지어 그 일들을 해치우는 와중에 ‘인간에게 불을 전해줬다는 이유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고 있던 프로메테우스까지 구한다. 드디어 인간의 정착 생활을 완성한 것이다 . 물론 그 와중에도 친구를 포함해 여러 사람을 죽였다. 뭐 그런 이야기다.


Antonio del Pollaiuolo <Hercules and the Hydra> Pollaiuolo

헤라클레스는 결국 제우스의 도움으로 신이 된다. 헤라클레스의 아들들(헤라클레이다이 Heracleidae)은 트라키스로 갔다 아네테에 정착하지만, 티륀스 군대에 의해 쫓겨나 50년 동안 떠돌게 된다. 그 50년 동안 헤라클레이다이들은 펠로폰네소스를 정복하고, 여러 도시를 세운 후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는 것이 신화 속 이야기다. 학자들은 헤라클레스의 영웅담을 ‘도리스인의 이동’과 연결 짓는다. 펠로폰네소스 지역의 대표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의 왕들은 자신들을 헤라클레스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이게 다 단군 할아버지가 고조선을 다스릴 때 있었던 이야기(기원전 2333년에 태어나서 1000년 동안 다스렸다고 하니까)다. 단군 할아버지는 어떤 기가 막힌 경험을 하며 나라를 다스렸을까? 어딘가 신화라도 남아있으면 좋으련만, 남은 것은 할아버지가 태어난 과정뿐이다. 너무 소박하다. 뭔가 더 필요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6시가 됐다. 게으름을 포기하고 일어나 아테네에서의 첫 일정을 준비한다. 집합 장소인 아크로 폴리스 역 근처까지 가는 버스를 숙소 앞에서 탈 수 있다. 버스만 제대로 탄다면 12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걷는다면 23분. 역시 구글이다. 그런데, 잠깐. 버스 티켓을 사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 것은 아무래도 인간이 준비해야 하는 모양이다.


인터넷에는 버스 역 인근 가게나 지하철역에서 티켓을 판다고 되어 있다. 버스와 지하철 모두 같은 티켓을 이용한다. 몇 번 이용할 것인지(1회용, 90분 용, 1일권, 한 달권 등등)에 따라 다를 뿐 기본적인 요금은 같다. 7시를 확인하고 숙소를 나섰다. 짧은 거리지만, 나 같은 쫄보에다 길치인 인간은 언제든 헤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거리는 분주했고 오전이지만 이미 햇살은 눈이 부셨다. 슈퍼마켓과 빵집, 카페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가게 앞을 청소하는 사람들도 눈의 띄었다.


염려와 딱 맞게, 버스 정류장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버스 티켓을 파는 기계도, 작은 가게도 아무것도 없다. 지도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한정거장쯤 떨어진 곳에 음료와 과자를 파는 작은 가판대가 보였다. 주인은 ‘버스 티켓을 사기 위해서는 지하철 역으로 가라’고 말해 준다. 이 방향으로 걸어온 이상 가장 가까운 역은……. 아크로폴리스 역이다.



아크로폴리스 역에 도착했을 때는 안개비가 흩뿌렸다. 햇볕에 그을리기 딱 좋은 날씨다. 일찍 서두른 데다 지도 앱이 제대로 도와준 덕분에 약속시간 30분 전에 도착했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표시를 따라 모퉁이를 돌자 그림처럼 공중에 솟아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 보였다. 뭔가 사진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기도 하고, 현실성이 없는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옆 카페테리아에서 시금치가 든 파이와 커피를 사서 공중 신전처럼 보이는 파르테논을 바라보며 먹었다. 계속 바라보아도 질릴 것 같지 않다.


아크로폴리스 위 파르테논 신전. 하늘에 떠 있는 것 같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 파르테논 신전은 기원전 447년 페리클레스에 의해 착공되어 438년에 완성된 것이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델로스 동맹’의 우두머리가 된 아테네의 위상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다.


물론 447년 이전에도 저 자리에는 신전이 있었다. 누가 보아도 풍수지리상 딱 ‘신전 자리’인 것이다. 하지만 페르시아와의 2차 전쟁 당시 아테네는 도시 전체가 함락됐다(기원전 480년). 당시 지도자였던 데미스토클레스는 싸울 수 없는 시민들은 인근 도시나 섬으로 강제로 소개시키고, 싸움 가능한 도시민들은 모두 배에 태워 살라미스 앞바다에서 전투를 준비한다. 아테네로 무혈입성한 페르시아 군은 닥치는 대로 건물과 신전들을 부수고 약탈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신전도 그렇게 사라졌다.


말하자면 살라미스 해전은 아테네라는 도시국가의 ‘명운’이, ‘전부’가 걸린 도박이었다. 그들은 퇴로를 차단한 채 결사항전을 벌인 것이다. 이겼기에 그리스 신화라도 전해 내려오는 것이지, 졌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저 엄청난 건축물을 만드는데 사용된 자금은 어디서 났을까? 아테네 사람들은 델로스 동맹의 기금을 유용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동맹국들의 생각은 달랐고, 이 일은 아테네 쇠락을 이끄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 세상에는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 속에도 ‘노아의 방주’와 동일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랜 옛날,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화가 난 제우스는 홍수를 내려 세상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한다. 이 결정에서 딱 두 사람, 데우칼리온과 그의 아내 피라만이 커다란 배를 만들어 살아남는다. 데우칼리온에게는 헬렌(Hellenn)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모든 그리스 부족의 시작이다. 헬렌의 후손 중 하나인 케크롭스는 아테네 여신의 도움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여신의 이름을 따 ‘아테네’라고 부른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아테네에 문명을 전하고, 결혼제도를 만들었으며, 사람들에게 올림포스의 신을 섬기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케크롭스의 후손들은 왕이 되어 아테네를 다스렸다. 네 번째 왕은 에렉테우스로, 그를 신으로 받든 이 도시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저 ‘파르테논 신전’ 옆에 ‘에렉테이온 신전’도 지었다고 한다. 이제 그 모든 것을 보러 갈 시간이다. 가이드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크로폴리스 지하철 역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옷에 떨어진 빵부스러기를 털고 슬슬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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