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까지 19시간

3. 아테네에 도착하다

by 지안

[이터널스]에는 10명의 초능력자가 나온다. 너무 많다. 그중 눈길을 잡는 것은 당연히 마동석 배우가 연기한 길가메시다. 다른 캐릭터의 매력이 없었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냥 난 한국인이니까 그랬다고 해두자.


극 중 우람하고 우직한, 쓸 줄 아는 것은 힘 밖에 없어 보이는 길가메시는 테나에게만은 따뜻한 남자다. 테나는, 그러니까 아테네는 정말 아테네다. 상대가 하나든 열이든 싸움에는 자신 있는 캐릭터다. 전쟁의 신이 싸움을 못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따금 이유 없이 눈이 휙 돌아가서 세상 모든 것을 두들겨 부순다. 내 편, 네 편이 없다. 잘 싸우는 사람이 그러면 당할 수가 없다.


이런 '테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길가메시뿐이다. 그는 자신의 몸이 다치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테나만 생각하고, 테나를 위할 뿐이다. 진장한 사랑꾼이다.


도대체 어쩌다 테나는 이렇게 '절반쯤 정신 나간' 캐릭터가 됐을까 곰곰이 생각한 결과 신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 분이 테나다. 앙다문 입술이 한 싸움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헤시오도스가 쓴 [신통기- 그리스 신들의 계보]에는 아테네 여신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는 신들과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지혜로운 메티스를 첫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 메티스가 눈이 빛나는 여신 아테네를 임신했을 때에, 제우스는 가이아의 별이 총총한 하늘의 충고대로 교활하게 달콤한 말로 메티스를 속여 자신의 몸속에 감추었다. 가이아와 하늘은 영원한 신들 중 제우스 이외의 어느 누구도 통치권을 넘겨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제우스에게 충고했다. 메티스는 처음에는 용기와 현명함에서 아버지에 필적하는 딸인 눈이 빛나는 아테네를 낳을 것이지만, 그다음에는 신들과 거친 인간들의 아버지가 될 아들을 낳을 운명이었다
......
제우스는 혼자서 자신의 머리에서 눈이 빛나는 아테네를 낳았는데, 그녀는 전쟁을 자극하는 무서운 여장군이며 패배를 모르는 여장부였으며, 전쟁의 혼란과 전쟁과 전투를 마음에 들어 있다. 그러자 헤라는 화가 단단히 나서 남편 제우스와 말다툼을 한 후 자신도 제우스와 동침을 하지 않고 유명한 헤파이스토스를 낳았다.



아테네 여신의 탄생에 대한 짧은 이야기이지만, 이 안에는 많은 교훈이 담겨 있다. 먼저 제우스.


하늘의 최고 권력자인 이 신은 자신의 아버지와 또 그 아버지의 운명을 걷는다. 회사원이 아들이 회사원이 되는 운명과 비슷하달까.


헤시오도스의 설명에 의하자면, 제우스의 할머니는 대지의 신 '가이아'다. 가이아는 혼자서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만들고 바다와 산의 수많은 요정들을 만들었다. 이후 혼자서 만드는 것에 싫증이 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결과물이 나오리라 기대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만들어 낸 우라노스와 부부가 된다.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강의 신과 눈이 하나뿐인 거인족 퀴클롭스와 장차 제우스의 어머니가 될 '레아'와, 훗날 아폴론의 할머니가 되는 포이베 등등을 낳았다. 낳고 낳고 낳다 보니, 엄청나게 크고 거친 아들들인 코토스와 브리아레오스와 귀게스를 그리고 마침내 크로노스 까지 만들고야 말았다.


이들의 모습을 묘사하면 이랬다.

그들의 겨드랑이에는 백 개의 거대한 팔이 솟아나 있었고, 그 거칠고 땅딸막한 어깨에는 쉰 개의 머리가 돋아나 있었으며 그들의 거대한 몸에는 엄청나게 강력한 힘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느 판타지 드라마에서 이렇게 생긴 인물이 등장했다면, 앞뒤 줄거리를 전혀 모르는 관객이라도 '앗, 저 것은 악역이다!'라고 곧바로 알아볼 수 있는 외모였다는 말이다.


조르조 바사리 <우라노스의 거세>. 낫이....크다! 위키피디아에서 펌


이들의 아버지인 우라노스 역시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하지만 곧바로 알아볼 뿐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관객과 달리 우라노스는 자식들을 엄마의 뱃속에 도로 집어넣어 버렸다(신화에는 '대지의 자궁에 가둬버렸다'란 그럴듯한 말로 나오지만, 그게 그거 아닌가). 그 커다랗고 흉측한 것들을 다시 뱃속에 넣었으니, 엄마인 가이아의 고통도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엄마는 뱃속의 아들들에게 낫을 주며 아버지를 죽여버리라고 사주한다. 다른 아들들은 쉽사리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크로노스만은 엄마의 말에 선뜻 동의했다.


우라노스가 가이아를 찾아온 어느 밤, 크라노스가 튀어나와 낫으로 아버지의 남근을 잘랐다. 그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에 눈길도 주지 않고 바다로 휙 던져버렸다. 남근이 날아간 남자는 내시가 될 수 있을 뿐 왕이 될 수는 없다. 우라노스는 그렇게 왕좌에서 밀려나서 자신의 원래 위치인 하늘로 돌아간다. 하지만 남근을 벨 때 떨어진 핏자국들에서는 복수의 여신이 태어났고, 잘린 남근은 바다에 표류하다 하얀 거품으로 변한 뒤 소녀 하나를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아프로디테 여신이다(다른 원본에서는 크로노스의 남근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아프로디테는 로마로 건너가면서 비너스가 된다.


이렇게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은 크로노스는 레아와 결혼하여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을 낳는다. 근대 심리학이나 프로이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었을지는 짐작되고도 남는다. 자식들 중 하나가 자신과 같은 짓을 하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할 수 있었겠는가.


크로노스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엄마의 뱃속에 가두었다가 화를 당했다. 이번에 크로노스는 직접 아이들을 집어삼키기로 한다. 레아에게 육체적 고통은 없었겠지만, 정신적 상처는 컸다. 자식을 무려 넷이나 잡아먹히다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을 것이다. 막내 제우스를 낳을 때쯤 레아는 엄마인 가이아와(물론 시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일단 내 엄마다) 이제는 비록 힘없는 처지인 아버지 우라노스에게 고민을 상담한다. 우라노스 입장에서는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둘은 열심히 작전을 짠다.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레아에게 크레타 섬으로 가서 아이를 낳으라고 말한다. 아이를 낳자 우라노스는 칠흑 같은 밤을 내리고, 레아는 그 어둠을 이용해 제우스를 숨긴다. 돌덩이를 담요로 둘둘 말아 제우스라 속이며 내밀자 크로노스는 냅다 삼켜 버린다.


제우스는 자라 크로노스가 삼킨 자신의 형제들을 토해내게 한 후, 역시 크로노스의 남근을 잘라버린다. 이후 당연히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늘의 지배자가 된다. 크로노스와 제우스의 운명은 다른 옷을 입은 쌍둥이의 모습처럼 닮았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크로노스]

그런 제우스였으니, 할머니 가이아가 말해 준 자신의 운명에 몸을 떨었을 것이 뻔한다. "아내 메티스가 낳은 첫 딸은 아버지만큼 지혜로울 것이고, 둘째인 아들은 너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다."라는 예언 말이다. 남근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을 수도 있다. 제우스는 아버지보다 한술 더 떠서 그 운명의 아들을 갖기도 전에 아내를 삼켜버린다. 점점 더 막장이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헤라와 결혼한다. 다른 여성들과도 끊임없이 염문을 뿌린다.


어느 날 그야말로 '머리가 부서지는' 두통을 겪던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을 받아(어느 판본에서는 헤파이스토스의 도움이라고 되어 있다. 알게 뭐람) 도끼로 머리를 가른다. 그 사이로 아테나가 완전 군장을 한 채 튀어나온다. 제우스의 지략과 지성을 물려받은 여신의 탄생이다. '지혜를 갖춘 여신'인 덕분에 아테네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는 달리 함부로 달려드는 신이 아니다. 방어의 신이고, 지략을 짜고, 섬세하게 공격하는 전쟁의 신이다.


판본에 이런 이야기는 없지만 결국 아테네도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았을 것이다. 이따금 하늘에서 열리는 술자리에서 넥타와 엠브로시아를 잔뜩 들이켠 신들이 술주정 비슷하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네 아버지가 이상한 예언을 믿고 네 엄마를 삼켜버렸거든...... 불쌍한 메티스, 좋은 여자였는데....."


Jacques Louis David의 [Minerva] 아테네의 로마식 버전이 미네르바이다. 투구와 방패가 포인트

자, 이제 [이터널스]의 테나가 왜 틈만 나면 눈이 돌아가 세상 모든 것을 부숴버리려고 했는지 이해가 된다. 불행한 가정사란 어느 쪽으로나 인간의 마음에 어두운 그늘을 남긴다. 하지만 무릇 신이라면, 어른이라면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 길가메시는 없지만 테라의 미래에 행복이 가득하길 빈다(이 정도가 스포일까요?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터널스의 후속작은 없었으면 좋겠다. 테라야 알아서 잘 살겠지. 무엇보다 안젤리나 졸리잖아.


이제 메티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이야기는 진짜 소름 끼친다. 시할머니인 가이아와 시할아버지인 우라노스는 손주 며느리의 슬픈 운명에 대해 일언반구 알려 주지 않았다. 제 피붙이인 제우스에게 '아직 생기지도 않은 네 아들이 너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다' 따위의 믿거나 말거나 한 예언을 해준 것과는 다르다. 과연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무시무시한 제우스가 메티스를 집어삼킬 것이란 사실을 몰랐을까? 몰랐으면 예언가가 아니지. 우라노스의 분노조차 손주 며느리를 지켜주지 못했다. 남근을 잘릴만큼 아들에게 당했더라도 우라노스는 아들의 아들 편이었다.


이러니 시댁과 며느리 사이에 끝없는 불화가 생기는 것이다. 쯧쯧




영화가 끝날 때쯤 밥을 먹고, 선 잠을 자다 깨서 간식을 먹었는데도 아직 도착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온몸이 잘못 맞춘 이케아 서랍장처럼 삐걱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영화도 음악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게 다 푸틴 때문이다.


원래 항로가 붉은색, 현 항로가 검은 색. 동아일보에서 펌.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기 전, 그러니까 평화로운 러시아 상공 위로 비행기가 부담없이 날아 다닐 때에도 인천 - 프랑크푸르트 구간은 11시간이 조금 넘는 험난한 구간이었다. 직선 거리가 멀어서 오래 걸리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전쟁 이후, 꼬박 2시간을 더 떠있어야 도착할 수 있는 '마의 구간'이 되었다(그래서 13시간 넘게 날아가야 한다). 아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가는 항공 편들은 직선으로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항로를 쓰는 대신, 중국 천산 산맥을 지나 튀르키에 상공을 지나는 뒤집힌 3자 곡선의 구불구불한 길로 운항할 수밖에 없다. 시간과 기름을 하늘에 뿌려대고 있는 것이다


꼭 그렇게 다 막아버려야 속이 후련했냐!!!!!!!


믿을 수 없겠지만, 하늘 길에도 교통 체증이 있다. 길은 가끔 막힌다. 단순히 많은 항공기가 지나가기 때문일 경우도 있고, 관제 장비가 고장 나거나, 군사 훈련이나 미사일 발사 때문일 수도 있다. 하늘에도 사건 사고는 의외로 많다. 다른 일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군사 훈련은 좀 구시렁거리게 된다. '좀 낮은 고도에서 하면 안돼? 꼭 그렇게 다 막아 버려야 속이 후련했냐?' 뭐 이런 마음이 되는 것이다. 자기 나라 영공에서 훈련을 하는데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길을 막아버리는 데는 한숨이 나온다. 항공기 지연은 필연적이다.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운명의 앙숙이다. 중국 하늘에서도, 튀르키예와 그리스 영공에서도 쉬지 않고 군사 훈련을 한다. 그런데 여기다가 푸틴까지.


푸틴 님. 평화는 소중한 것입니다. 이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주실 수 없을까요? 우크라이나에게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항공기 한 대가 2시간씩 더 날아가면, 그래서 기름을 더 많이 쓰면 지구에도 좋지 않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지구를 위해서도 이제 좀 그만해 주시죠.




마지막으로 주는 밥을 꾸역꾸역 먹고 나니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기내에서 해야 하는 마지막 미션을 실행할 시간이다. 내 것이지만 언제나 봐도 잘 모르겠는 핸드폰을 아래 위로 훑어 내리며 유심의 위치를 찾았다. 나는 이번 유럽 여행을 위해 무려 7기가짜리 유심칩을 준비했다. 지도는 없다. 가이드북도 없다. 구글이 나를 인도할 것이다. 내게는 구글이 북극성이고, 알파요, 오메가다.


한참을 버벅거린 끝에 가까스로 유심칩을 갈아 끼웠다. 당분간 내게 오는 전화도, 메시지도 받지 못할 것이다.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인터넷뿐이다. 뭐가 문제인가. 어차피 걸려오는 전화는 회사 아니면 스펨이다. 둘 다 반갑지 않다. 친구들은 메신저를 사용한다. 갈아 끼운 유심칩으로 메신저는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이후, 비행기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그리스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1 터미널로 이동해야 했다. 늦게 도착한 짐을 찾아 허겁지겁 도착장 밖으로 나오자 갈색 병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350미리짜리 작은 병이 아니다. 500미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맥주를 생수 마시듯 듯 목으로 넘기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정말 독일에 왔다는 느낌이 든다.


1 터미널의 체크인 카운터 앞은 대기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음 비행기를 탈 때까지 여유 시간은 3시간. 사전 좌석 체크인을 하고 오긴 했지만 짐을 부쳐야 하는 난관이 놓여 있다. 늘어선 사람들 뒤에 섰다가는 시간 내에 다음 비행기를 탈 수 없겠다는 느낌이 스멀거렸다. 심호흡을 하고 카운터 밖에 선 제복 입은 직원에게 다가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사정을 말하자,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451번으로 가라고 말한다.


남자의 표정이 기분 나쁘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다. 451번부터 늘어선 카운터는 셀프로 짐을 붙일 수 있는 기계가 늘어서 있을 뿐 이용자는 거의 없다. 인터넷으로 발급받은 보딩패스를 찍자 짐텍이 스르르 밀려 나온다. 직접 가방 손잡이에 붙여서 수화물 벨트 위에 놓으면 끝. 묘하게 자동화와 비자동화가 섞인 공항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모든 일을 순식간에 끝낼 수 있어 고마울 뿐이다.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그리스라는 또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것이지만, 쉥겐 조약으로 묶인 이 나라들 사이에는 특별한 절차가 없다. 서류도, 질문도, 도장도 없다. 마치 김포공항에서 제주로 가는 것처럼 검색대 한 번만 통과하면 그만이다.


2시간 20분 후, 나를 태운 비행기는 그리스 아테네 공항 상공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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