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만난 일행들과 함께 메테오라로향했다. 우리가 탄 9인승 미니밴은 막히는 도로 사이를 슬금슬금 전진했다. 가이드가 아테네 도심을 소개하며 운전하기 적당한 속도다.
“저쪽이 국립 정원이고…… 이쪽이 신타그마 광장입니다...... 이 길은 원래 지금보다 양쪽으로 1차선씩 더 있는 도로였는데, 사람들이 시위를 많이 하니까 한 차선씩을 없애 버렸어요. 하여간 정부는 어디나 대단하죠? ...... 저기 저 동상 보이시나요? 저 잘생긴 청년이 바이런입니다.”
누군가 ‘무슨 시위’냐고 물었다.
“부정부패, 경기 침체 뭐 다양한 원인이 있죠. 실업률, 연금 개혁….. 말하자면 길어요.”
천천히 움직이는 차창 밖으로 바쁘게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평화로운 아침 풍경이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움은 그리스의 역사에 비춰 상당히 ‘낯선’ 것이다. 최근까지도 그리스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외 토픽’을 장식해왔다. 특히 터키와의 관계는 언제나 문제다. 요즘엔 세상의 시류에 맞게 경제 문제로 포커스가 옮겨졌지만.
그리스가 오스만 튀르크(혹은 튀르키예)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된 것은 1832년 5월이다. 당시 우리나라도 조선 순조 시대였으니 상황이 엉망이었던 것은 비슷했다. 1821년부터 29년까지 그리스인들은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였지만, 막상 독립은 그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찾아왔다. 우리가 광복군과 임시정부를 통해 힘든 투쟁을 오랜 기간 펼쳤지만,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독립을 맞았던 것과 같다. 우리나라보다 좀 더 이상했던 점이 있다면, 독립과 왕이 ‘1+1’으로 따라왔다는 것이다.
독립을 축하하는 주교, 테오도로스 리자키스, 위키 펌.
그리스의 독립을 결정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바이에른 왕국의 왕 ‘비텔스바흐 오토(혹은 오톤)’을 ‘국왕’으로 보냈다. 왜?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다 왕이 있으니, 당연히 그리스에도 ‘왕’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어디선가 그리스와 관계된 인물이라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럴 정성은 또 없었다. 그래서 세 나라의 왕가는 아니지만, 세 나라와 조금씩 관련이 있는 독일 지방의 군주를 데려왔다. 뭐 하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바이에른, 즉 독일계 혈통이던 ‘새로운 왕’은 그리스어를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하는 것도 거부했다. 게다가 유럽에서 공부했거나 콘스탄티노플 등 오스만 제국에서 활동한 그리스 인들을 관리로 등용했다. 우리로 말하자면 도쿄 유학생이나 일본에서 관리하던 한국인을 요직에 앉힌 꼴이다. 국민들이 쉽게 납득할 리가 없다.
국토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수도’라고 생각했던 콘스탄티노플이나 테살로니키 같은 상업지역은 영토로 편입되지 못했다. 남은 것은 아테네 및 산악지역뿐이었다. 이때부터 ‘영광스러운 콘스탄티노플 및 비잔틴의 영광을 되찾자’는 움직임이 번진다. ‘고토 회복 운동’이라고 불린 이 생각은 두고두고 그리스의 발목을 잡는다. 콘스탄티노플(오스만 이름으로는 ‘이스탄불’)이 중요한 것은 오스만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좋은 땅은 누구나 탐이 난다. 세상 일이 다 그렇지, 뭐.
1843년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왕은 독일군을 불러들여 진압한다. 할 수 없이 독립 전쟁 세력이 나선다. 독립 전쟁 때 군대를 이끌어 봤던 사람(이들은 군에 있었다. 즉 그리스 군대가 집결한 것이다)들이 아테네 궁궐 앞에 집결해 왕이 헌법을 승인할 때까지 해산을 거부했다. 시민들의 지지도, 독일의 군대도 없는 왕의 권위란 보잘것없었다. 왕은 별 수없이 그들의 요구를 전부 수용했다.
이분이 비텔스바흐 오토 1세. 위키 펌
이후 왕의 권위가 지하까지 곤두박질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1853년 영국, 프랑스, 오스만 튀르키예가 한 편이 되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크림전쟁’ 때문이다. 그리스는 당연히 러시아 편이었다. 크림전쟁은 ‘종교’가 원인이 된 전쟁이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러시아 편을 들었을 것이다. 오스만과 같은 편이 될 수는 없다. 지금의 튀르키예와 그리스 사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무튼 크림 전쟁이 벌어져 그리스 군이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함대를 보내 피레우스항을 봉쇄해 버린다.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그리스 인근 섬에 함대를 주둔시킬 권리를 요구한다. 참고 있던 그리스 국민들이 폭발했다. 1862년 쿠데타로 오토 국왕은 독일로 돌아갔다.
이 정도면 그리스에 왕을 세우는 일을 포기할 법도 한데, 영국과 프랑스는 그렇지 않았다. 이번에는 덴마크 왕국의 게오르그 왕자를 보내 요르요스 1세(혹은 게오르그 1세) 왕으로 만든다. 1864년 왕위에 오른 요르요스 1세는 이전 왕보다는 상태가 괜찮았다. 왕이 되자마자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하고, 국회를 만들어 ‘입헌 군주제’ 나라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잃었던 국토를 야금야금 회복한다. 1864년에는 영국으로부터 이오니아 섬들을 찾아온다. 1881년에는 테살리아를, 1913년 2차 발칸 전쟁 후 크레타 섬까지 병합한다. 지금 그리스 영토의 70퍼센트 정도가 이때 회복된다. 올림픽이 처음 열린 것도 요르요스 1세 때 일이다. 1894년 4월 제1회 하계 아테네 올림픽이 개최된다(물론 이때에 마라톤 경기는 42.195km를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암살과 폐위 같은 ‘무릇 왕가라면 겪어야 할’ 여러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그리스 왕정은 그럭저럭 유지된다. 1차 세계대전과 터키-그리스 전쟁,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까지 버텨낸 ‘타국에서 온 왕들’은 1967년 4월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를 끝으로 망명해 버린다.
‘군부 쿠데타’이라는 것의 성질이 그렇듯, 쿠데타는 ‘군부 독재’, 그리고 ‘반독재 시위’로 이어진다.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키프로스 섬에서 투르키예와 으르렁대는 모습까지 연출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1974년 7월 군사정권은 막을 내린다. 자, 이제 다시 왕을 불러올까? 1974년 군주제 부활에 관한 투표를 실시하지만, 그리스 인들도 이번엔 참지 않았다. 왕 따위는 필요 없다. 그리스는 의원 내각제 국가로 거듭난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가 더 이상 국제 뉴스 란에서 모습을 감췄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1986년 12월 그리스와 튀르키예 순찰대가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우리가 ’ 86 아시안 게임’을 끝내고 한숨 쉬고 있었을 때다. 1987년 2월 튀르키예가 한발 물러나며 전쟁까지 비화되지는 않았다.
이런 기사는 아주 익숙하다. 2020년에는 전쟁 안 했네, 뭘.....
그리스(그리스는 1981년부터 EU 회원국이었다)가 1994년 EU와 튀르키예의 관세동맹을 반대하면서 두 나라는 다시 격돌한다. 1995년 2월 튀르키예와 그리스 양측 공군이 출격하면서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과거의 원한에 더해, 에게해에 매장되어 있는 ‘천연가스’가 실제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1996년에는 그리스령 암초 섬인 이미아(Imia)에 튀르키예인들이 상륙해 깃발을 꽂고, 다시 그리스 군에 의해 저지되는 사건도 발생한다. 튀르키예- 그리스 혹은 그리스-튀르키예 판 ‘독도문제’다.
하지만 더 큰 뉴스는 그 이후로 쏟아졌다. 그리스가 EU와 다른 나라에서 빌려온 차관을 갚지 못하면서 벌어진 디폴트 위기가 그것이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와 비슷한 시기 생긴 산불로 그리스 경제는 심각할 정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국가 채무가 급증하면서 실업률이 치솟고 먹고 살기 힘들어진 시민들의 뛰쳐나와 시위가 벌어진다.
2010년 IMF는 구제금융을 주는 대신 가혹한 경제 정책을 요구한다. 이건 1997년에 우리도 당해본 일이다. 이후 그리스는 EU 탈퇴와 구제 금융에 관한 많은 뉴스를 쏟아냈다. 대략 2020년 정도에 끝난 3차에 걸친 구제 금융은 여러 의미로 그리스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이런 것도 아주아주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그리스에 관한 뉴스였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부패인식지수는 언제나 상위권이고, 복지정책도 후퇴했다. 산업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튀르키예 때문에 국방비를 줄일 수도 없다. 거기다 COVID19로 그나마 괜찮던 관광업도 쑥대밭이 되었다. 그리스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까.
“그리스 사람들은 자존심이 대단합니다. 그 영화 보셨어요? 나의 그리스식 웨딩?”
미니 벤 안이 조용하다. 나는 봤지만 잠자코 있기로 한다.
“그 영화에 보시면 아버지가 엄청 자부심 있잖아요. 그리스인이라는 것에 대해. 그런데 진짜 그래요. 소크라테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라는 거죠. 북마케도니아 문제 아십니까?”
이건 나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 잠자코 있어야지.
“유고연방이 깨지면서 거기에 마케도니아라는 나라가 생겼잖아요.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다스렸던 나라의 북쪽 아주 조금이 현재 마케도니아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나머지 영토는 다 그리스 땅에 속해 있거든요. 게다가 그 마케도니아인들은 슬라브인 입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라는 국명을 썼을 때 그리스 사람들이 엄청 화냈어요. 땅도 조금밖에 없고, 같은 민족도 아니면서 자기 선조의 명칭을 쓰면 기분 나쁘다 이거죠. UN에 가서도 난리를 쳐서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으로 가입을 못했어요, 그 나라가. 그러다 2019년에 나라 앞에 ‘북’ 자를 하나 붙여서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래도 여기 사람들은 싫어해요.”
나는 ‘북마케도니아’ 땅이 알렉산드로스가 왕자일 때 말 눈을 살포시 해 쪽으로 돌렸던 그 왕궁이 있던 도시로 알고 있었다. 아니었네. 이렇게 또 하나를 배운다.
우리가 탄 미니밴은 꽉 막혔던 정체를 뚫고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왕복 4차선의 도로는 한산했다.
“그리스는 우리나라보다 1.2배 정도 큽니다. 대부분 산지 지형으로 목축업이나 농업을 하기도 하지만, 대규모로는 불가능합니다. 아테네에만 인구의 1/3이 살고 있는데, 지금도 인구 유입은 계속되고 있어요. 다른 도시에 직장이 많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리스 와인에 관해 물어보시는 분들 계시는데, 여기 와인 산업은 이슬람 통치받던 시절에 다 죽어버렸어요. 프랑스나 이탈라아 같은 곳으로 유학 가서 배워 와 새롭게 와인 산업을 일으키려는 양조장들이 몇 개 생기고 있습니다. 올리브 같은 것도 상황은 비슷하고요. 제조업이 완전히 주저앉았어요. 어떻게 보면 아직 과거의 상처가 다 극복되지 못한 겁니다.”
그리스가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튀르키예의 지배를 받은 기간은 400년이다. 우리와는 단위가 다르다. 당연히 극복에도 그만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우리는 과연 온전히 극복했나? 그것도 의문이다).
창 밖으로 산들이 계속 이어진다. 나무가 있는 곳도, 황량한 산도 섞여 있다.
“저기 보세요. 검게 탄 흔적이 보이시죠?”
일행들이 일제히 가이드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높은 산 중간에 거대한 검은 흔적이 길게 이어져 있다. 옆에 있는 산도 상황은 비슷하다.
“2007년, 2008년에 엄청나게 산불이 났었는데, 그게 아직도 복구가 안 됐습니다. 그럴 경황이 없었어요. 이쪽 경제가 그런 것을 신경 쓸 만큼 여력이 없었죠.”
스산하다. 우리나라도 부쩍 산불이 늘었다. 강원도에는 2019년 산불로 타버린 건물이 아직도 방치된 곳이 많다.
우리의 여정은 아테네에서 시작해 델피를 거쳐 메테오라까지다. 멀다.
“우리는 오늘 ‘루카스 수도원’을 들렀다, ‘아라호바’라는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할 겁니다. ‘델피’를 거쳐서 메테오라 수도원이 있는 칼람바카 지역에서 1박 할 예정입니다. 그럼 수도원에 도착할 때까지 고대 그리스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가이드가 신화와 역사가 섞인 그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수도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스무 대 정도 세울 수 있을 것 같은 아담한 주차장이다. 근방에 인가가 없어서 시동을 끄자 새소리만 남았다. 수도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루카스 수도원은 동로마 시대에 건설된 그리스 정교 수도원입니다. 호시오스 루카스(Hosios Lucas)라는 이름의 수도사가 946년에 살았던 거처 위에 지은 수도원입니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된 곳이기도 하구요, 일단 들어가 볼까요?”
짧은 설명 후 가이드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평평하게 맞춘 돌들이 이어진 아름다운 계단이다.
이렇게 사진을 찍으면 잘 나온다고 가이드님이 말씀하셨다
“있다 여기 올라 가실때 사진 찍으시면 예쁘게 나옵니다.”
사진을 찍느라 뒤로 처진 손님들을 추스르기 위한 가이드의 작전인지는 모르겠으나(돌아올 때 사진을 찍어보니 정말 예쁘게 나오기는 했다), 뒤쳐졌던 사람들까지 금세 모여들었다. 우리 단체를 제외하고 다른 관광객은 보이지 않는다.
“루카스 수도사는 뛰어난 예언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 황제가 할 일을 맞췄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사후 이런 멋진 수도원이 생길 것이라는 걸 알았을까요? 수도원은 16세기 지진으로 무너졌다 20세기에 발굴, 복원됐습니다.”
수도원 안은 프레스코화로 가득했다. 루카스 수도사의 관도 있다. 에이, 설마.
“정교회에서는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 그 밖에 성서에 기록된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 넣습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죠. 이곳의 그림들도 그런 프레스코화입니다. 그런데 저 그림 보세요. 얼굴이 지워진 사람이 있죠? 왜 그랬을까요?”
일행이 조용히 가이드를 바라보자 말했다.
“도마의 얼굴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죠. 그런데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먹은 제자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도마의 얼굴을 괘씸하다고 지워버린 겁니다. 그리스 여행을 하실 때는 그리스 신화와 성경에 관해 알고 계시면 편합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걷다 보니 조용한 마당으로 이어졌다.
뜰에서 본 루카스 수도원
“이제 아라호바 마을로 가보겠습니다. 어딘지 다들 아시죠?”
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안다는 대답을 했다. 난 모른다. 누구냐, 아라호바? 멍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나를 보고 가이다가 설명을 붙였다.
“송송 커플이 함께 출연해 유명해진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 유명합니다.”
아라호바 - 관광지답게 사진찍는 전망대도 있다
아, 그렇군요. 그래도 모른다. 나는 2016년에 방영한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다만 우연히 그 드라마 첫 회를 본 후, 나머지를 다 몰아서 보느라 한잠도 못 자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출근한 동료를 본 기억은 있다. 그 정도로 중독성 있는 드라마였다는 것만 안다.
하지만 오래전 이야기다. 드라마에서의 커플은 현실의 부부가 됐었지만, 이미 남남이 된 지 오래다. 송송 커플의 만남과 헤어짐에 관한 수다가 차 안을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저런 식으로 박제된 과거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이렇게 아라호바 마을이 나온답니다. 보신 분?
일행에게 조용히 물었다.연예인의 사생활은 관심 없지만, 인간의 감정이란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재방송되어 지금도 채널을 돌리다 만나게 되는 예능프로가 있다. 6-7년 전에 촬영한 그 프로그램 속에는 한 출연자가 아내에게 보내는 달달한 멘트와 문자들이 그대로 흘러 나온다(후에 굉장히 시끄럽게 이혼했다). 이따금 자료 화면으로 아내의 얼굴이 지나가기도 한다. 혹시 나처럼 채널을 돌리다 그런 것들이 튀어나오면 본인들은 어떤 기분이 될까?
“뭐 좋진 않겠지만, 돈 많이 벌었잖아. 케이블 재방송되면 출연료 추가로 입금된대. 너 그거 모르지?”
일행이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자본주의에 급소를 찔린 나는 순간 휘청했다. 사랑이 끝나고 돈이라도 남는 사이라면, 그럼 좀 나을까? 그럼 모든 상황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