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언어의 끝>
<< 밖에서 부는 거친 바람을 따라 방 안의 촛불이 일렁였다. 해정(亥正)에 이르러서야 집에 돌아왔으니 피곤하시기도 할 터인데 서방님께서는 의관을 벗지도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들이켜시고는 주위를 경계하시는 듯 목소리를 낮추어 말씀하셨다.
“전하께서 새로운 글자를 만들려고 하신다네.”
서방님이 집현전으로 자리를 옮기신 후 임금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전해 들었다. 천성이 총명하시다는 것, 경연에 임하여 모두가 허를 내두를 정도의 지혜로운 말씀을 하신다는 것, 밤늦도록 일을 하셔서 신하 된 자로써 일찍 집에 오기가 어렵다는 것 등 대부분은 밝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새로운 글자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서방님이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쉬운 글자를 만들라는 어명이시네만, 난 도무지 백성들이 왜 글자를 알아야 하는지 모르겠네. 조정의 대신들도 앞다투어 반대를 하고 있어.”
서방님의 표정은 어두웠지만 내 마음에는 ‘글자’라는 말이 환하게 떠올랐다. 새로운 글자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언뜻 떠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사용하는 한자는 배우기 쉽지 않다. 백성들뿐 아니라 아녀자들도 글자를 모른다. 나는 비록 아버님의 허락으로 사서삼경까지 읽을 수 있었지만 이것은 흔한 경우가 아니다.
“대신들이 반대한다 하나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만들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글쎄, 반대도 반대려니와 어떻게 그것을 만들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 걱정이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후한의 장수 경엄의 고사를 잊으셨사옵니까.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이라 하였습니다. 올바르게 뜻을 가지고 노력하면 반드시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비로소 서방님이 빙긋 웃으며 말씀하셨다.
“자네의 이야기가 위로가 되는구먼.”
“아녀자일 뿐이나 글을 알기에 서방님께 자그마한 위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에게도 이런 기쁨을 알려주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 성화몽기 중 일부 발췌 >>
지현은 팔짱을 끼고 몹시 성가신 표정으로 앞을 응시했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마스카라와 쉐도우로 멋을 낸 여성의 푸른색 눈을 확대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무렇게나 휘갈긴 글씨가 적힌 용지가 흩어져 있었고, 종이 아래로 검은색 숄더백 사진이 절반 정도 삐져나와 있었다. 저 아리안 여성이 원해야 하는 것이 사진 속 삼천 유로짜리 검은색 숄더백이어야만 한다.
“성공했어?”
광고 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직원이 책상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지현이 말했다.
“너의 마음이 닿는 곳, 아이젠리베.”
“나쁘지 않은데?”
“너무 흔하대. 좀 더 새롭고 귀에 꽂히는 단어를 찾으래.”
직원은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숙이는 지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사라졌다. 귀에 꽂히는 단어이라니, 말은 쉽지. 지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때 지현도 언어의 힘을 믿었던 적이 있었다. 언어란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을 구조화하는 방식이다. 언어가 달라지면 세계가 달라진다. 인간이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틀 안에서만 세상을 인식하는 법이다. 한국인에게 푸르고, 파랗고, 퍼런 하늘이 있다면 이누이트에겐 그 숫자만큼의 흰 눈이 있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지현의 마음을 뛰게 했는지……. 언어학을 전공하는 내내 지현은 언어가 인간과 세상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광고계에서 십 년쯤 일을 한 지금 말하라면, 언어란 수단일 뿐이었다. 그저 지갑을 열고 흔쾌히 카드를 꺼내게 하는 수단. 눈동자가 자신을 째려보는 것 같다고 생각할 즈음 지현은 패배를 인정했다. 뒤를 돌자 2주 전 파트타이머로 입사한 레나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녀의 책상에도 같은 눈이 붙어 있었다. 어쩌면 이 일은 레나에게 어울릴지 몰라, 지현은 생각했다. 어쨌거나 아이젠리베는 20대 여성을 겨냥한 브랜드다.
지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SNS메시지가 왔다는 알람이 다섯 개 떠 있었지만 무시했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지현은 흩어진 종이들을 구겨 휴지통에 처박은 후 사무실을 나왔다.
맥주를 한 잔 비웠을 때 다니엘이 나타났다. 6시 45분의 바는 아직 취기가 오르지 않은 사람, 정신을 잃으려는 사람,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거렸다.
청바지에 목이 늘어난 회색 티를 입은 다니엘은 바지 주머니에 왼손을 꽂은 채 다가와 지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얼굴 가까이 입술을 가져왔다. 가글 향에 섞인 술 냄새가 훅 풍겼다. 지현이 몸을 비틀며 옆으로 비켜서자 다니엘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지나갔다. 휙 몸을 틀어 카운터로 향하는 다니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방금 베개에서 뗀 듯 눌린 덥수룩한 머리와 구겨 신은 회색 – 아마도 처음엔 흰색이었을 -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지현은 핸드폰 속 인스타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시간은 어젯밤이거나 혹은 오늘 아침. 장소는 한나의 집. 어젯밤 한나의 승진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린 것을 지현도 알고 있었다. 아이젠리베의 광고주와 미팅을 하느라 참석하지 못했을 뿐 미리 선물을 보내기까지 했으니까.
그리고 거기서 저 남자, 그러니까 한 달 전 지현에게 반지를 내밀며 청혼했던 다니엘이 한나와 키스하는 사진이 오늘 아침 인스타에 올라왔다. 한 두장이 아니었다. 핸드폰 밖에서 봐도 다니엘과 한나가 서로를 바라보는 후끈 달아오른 시선이 느껴졌다. 한나와 지현이 대학 때부터 단짝 친구였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마침 파티에 참석했던 친구가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렸다. 술에 취해 춤추는 남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카메라의 중심을 벗어난 지점에서 한나와 다니엘은 키스를 하고 있었다.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었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남자와 여자의 배경에서도 한나와 다니엘은 끌어안은 채였다. 그 외 다양한 사진에서 한나와 다니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현은 한숨을 쉬며 마주치는 사람들을 피하며 걸어오는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자기 무슨 일 있어?”
맥주잔을 들고 자리로 온 다니엘이 물었다.
“어제 파티는 재미있었어?”
지현이 딱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니엘이 왼쪽 눈을 살짝 찌푸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가 짓는 특유의 표정이다.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별로였어. 미팅은 잘 됐어? 너 요즘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일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지. 하지만 지금은 너 때문에 화가 난 거야. 어제 파티에 한나는 좋았어?”
지현은 말하며 다니엘과 한나의 사진이 올라온 인스타 사진을 내밀었다. 핑크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샴페인을 터뜨리는 사진이었다.
“아는 사람이야? 이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다니엘이 중얼거리며 핸드폰으로 몸을 숙였을 때 지현이 사진의 배경 한 부분을 확대했다. 벽에 붙은 한나와 다니엘이 진한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또렷하지 않게 보였다.
“너 나에게 청혼한 것 아니었어? 지금까지 한나랑 있었어? 오늘 출근은 한 거야?”
확대한 화면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던 다니엘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도대체 뭐 어쨌다는 거야? 그냥 승진을 축하하는 키스를 한 것뿐이야. 게다가 출근을 하든 말든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 너희 아시아인들은 이게 문제야. 한나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어.”
“너희 아시아인?”
“그래. 아시아인들은 별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지. 이제 회사를 쉬었다는 이유로 내 성실성을 의심할 건가?”
“그 말 취소해. 난 독일에서 태어났고 여기서 쭉 자랐어. 너희 아시아인이라니. 그런 인종 차별적인 말은 사과하지 그래?”
다니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나와는 아무 일도 없었어. 회사도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어 하루 쉰 거야. 너까지 왜 이러는 거야? 잠깐만, 혹시 한나가 뭐라고 했어?”
지현은 말없이 다니엘을 쏘아봤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다니엘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 여자들이란. 항상 여자들이 문제야.”
지현은 왼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다니엘의 맥주잔에 안으로 던지며 말했다.
“인종차별로 모자라서 여성 혐오까지. 정말 가지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