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언어의 끝>
<<오늘 대감께서 연회에 다녀오시며 이야기를 전해주시었다.
박 대감 댁 종이 일을 도와주러 온 찬모에게 “오늘 오실 손님들이 지체 높으신 분들이시니 상 위를 고이 꾸려야 한다”라고 닦달하였더라. 이에 찬모가 상 위에 향초와 꽃잎을 깔고 그 위에 음식을 놓으니, 제사상인가 여겨 손님들이 아무도 수저를 들지 못하였다.
내가 웃으며 종이 ‘고이’하라 함은 ‘정갈하게 하라’고 한 것인데 찬모가 ‘예쁘게 하라’는 것으로 잘못 들었나 봅니다 하고 말했다. 허나 대감이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나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으나 집에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러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소. 그 집 남자 종이 윗사람들에게는 고분고분하나 아랫사람들에게는 거칠게 구는 자였나 보오. 말이란 무릇 휘두르는 것이 아닌데, 그 집 종은 늘 아랫사람을 업수이 여겨 큰 소리를 내니 그것이 불만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요.”
“그래서 그 종은 어찌 되었습니까?”
“잔칫상 하나 제대로 올리지 못한다 하여 박대감에게 경을 쳤소이다. 무릇 말이란 그 겉에만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행간에도 뜻이 숨어 있는 법인데, 찬모가 모르는 척 그걸 무기로 삼은 것이지요. 하하.”
- 성화몽기 중 일부 발췌>>
방문을 열자 오래된 나무문 특유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방은 한참 동안 비어 있었다고 했다. 지현은 문과 그것이 연결된 부위를 살펴보며 어떻게 손을 봐야 할지 잠시 궁리했다.
2층 거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아래쪽으로는 삼청동 골목길이, 조금 멀리로는 경복궁의 지붕과 그 너머의 빌딩 숲이 보였다. 화려한 전망이다. 이런 풍경을 매일 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도 만족스러워했을지 모르겠다고 지현은 생각했다.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계단을 올라오는 오경혁이 보였다. 곱슬거리는 머리와 안경, 짙은 청색 모직 코트와 베이지색 머플러, 갈색 가방과 베이지색 바지, 갈색 구두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갑자기 느껴지는 냉기에 몸을 떨면서 지현이 말했다.
“우와, 진짜 여기가 고관대작이 사는 집이군요. 문 밖에서 보는 것과 또 달라요.”
경혁의 시선을 따라 지현도 같은 방향을 돌아보았다. 밤이면 켜지는 가스등들은 지금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깨끗한 잔디가 깔린 정원 한쪽의 연못 옆으로 나무 데크가 길게 깔려 있었고 담을 따라 잘 정리된 나무들이 키를 맞춰 서 있었다. 경혁이 감탄하듯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옅은 커피 향이 났다. 흰 블라우스와 검은 슈트를 입고, 흰머리를 남김없이 뒤로 묶어 올린 마른 여성이 웃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여사님.”
어색한 표정의 지현과 달리 경혁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응접실에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지현이 말하자 여성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고 두 사람을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좁은 현관을 지나 확 트인 거실 왼쪽에 묵직한 호두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소파가 놓인 응접실이 있었다. 정원으로 통하는 유리문은 반쯤 커튼이 걷어져 있었고 커튼 옆으로 목이 긴 청동 램프가 서 있었다. 높은 천장 위에서도 유리를 사이에 두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거실 오른쪽으로는 가죽 장정으로 된 책들 사이로 기념패와 훈장들이 놓여 있었다. 슬리퍼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참나무로 된 마루 위를 지나 붉은색 카펫 위에서 멈췄다. 테이블 옆 벽난로는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는데 곧 제 할 일을 할 계절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별 일 아닙니다. 나가기 전에 차를 준비할 수 있어서 마음이 놓입니다.”
소개를 해달라는 듯 경혁이 지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여기 최여사님은 할아버지와 50년 정도 생활하신 분이에요. 이 집 관리도 하시고 할아버지를 챙겨주시기도 하시고, 그렇죠?”
최여사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처음 듣는 사람이 오해하기 딱 좋게 말씀하셨어요. 제 소개를 제가 드려도 될까요?”
최여사는 경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이 집에서 51년 동안 일을 했답니다. 처음엔 주방에서 보조일을 했고, 그다음엔 주방, 그다음엔 집안일을 총괄하는 일을 했죠. 보시다시피 이 집의 규모는 한 사람이 집 전체를 관리할 만한 그런 곳이 아닙니다. 20년 전에 사모님 돌아가실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후엔 일이 좀 많았답니다. 장관님은 집 안 일에 관심이 없으셔서 집에 관해서는 뭐든 저에게 결정하게 하셨거든요.”
“멋지십니다. 그런데 여사님, 앉아서 좀 더 얘기를 해주시겠어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경혁이 말했다. 어쩌면 녹음 버튼을 눌렀을지도 모르겠다고 지현은 생각했다. 최여사는 괜찮겠냐는 듯 바라보았고, 지현은 재빠르게 앉으시라는 손짓을 하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짙은 갈색으로 된 소파에서는 은은한 시트러스 향과 오래된 나무향이 느껴졌다.
“정말 멋진 집이네요.”
경혁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거실 구석구석에 시선을 주었다. 최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가꿨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이라 저도 눈에 담고 싶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시라고요?”
처음 오는 듯이 응접실을 천천히 둘러보는 최여사에게 경혁이 말했다.
“네, 제 나이가 70입니다. 장관님 계실 때엔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수 없어 계속 있었습니다만 제 자식들도 이제 일을 그만두라고 성화입니다.”
“이 집을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요?”
경혁이 지현에게 물었다.
“장관님께서는 준비를 해 두셨습니다. 전 일을 그만두지만 이곳에는 일주일에 세 번 일하는 사람이 올 겁니다. 사실 장관님께서는 일하는 분이 상주하시길 바랐지만 아가씨가 내켜하지 않으셨습니다.”
경혁을 향해 지현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이 집을 돌 볼 사람들을 관리하는 재단을 따로 만들어 놓았더라고요. 임금이나 퇴직금 전부 그쪽에서 지불될 수 있도록. 그래서 전 그냥 몸만 들어오라는 거였는데, 제가 안 내켜서 엊그제 변호사와 한참 실랑이를 했어요. 결국 일주일에 세 번으로 땅땅땅. 하지만.”
지현이 최여사에게 말했다.
“여사님은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시잖아요. 앞으로도 이 집을 쭉 돌봐 주실 거잖아요. 물론 일은 다른 분들이 하시겠지만 이 집에 대해 가장 잘 알고 뭐가 필요할지 결정하실 수 있는 건 여사님이에요.”
“이 집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저라는 건 부인하지 못하겠네요. 아가씨가 필요로 하시면 언제든 나타나도록 하겠습니다. 재단과도 계속 얘기하겠고요. 아가씨가 어머니 배 속에 계실 때도 전 이 집에 있었습니다. 저도 이 집에 정이 많이 들었어요.”
경혁이 흥미롭다는 듯 몸을 앞으로 빼며 물었다.
“아, 지현 씨가 배속에 있을 때요?”
“네, 아가씨 어머님, 그러니까 작은 사모님도 여기서 신혼을 시작하셨어요. 도련님이 광주에 있는 대학으로 출강을 다닐 때도 작은 사모님은 여기 계셨죠. 두 분이 독일로 유학을 가시고 중간에 한 번 들어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임신 중이라고 하셨어요. 태어나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뵙지는 못했네요.”
“지현 씨 아버님과 어머님도 여기서 사셨다고요.”
경혁의 물음에 최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관님 내외분은 2층에서 생활을 하시고, 아드님 내외는 1층에서 사셨습니다. 정말 어제 일처럼 떠오르네요. 작은 사모님은 명랑한 분이셨어요. 도련님은 말수가 없고 과묵했지만 작은 사모님과 계실 때면 표정이 환하셨죠.”
“그럼 제가 지금 지내는 방이 할아버지가 쓰셨던 곳인가요?”
“반은 맞고 반은 아닙니다. 그 방은 큰 사모님이 쓰시던 방이에요. 20년 전 돌아가실 때까지 그 방을 쓰셨어요. 장관님도 그곳에서 계시다 도련님이 유학가시고 1층으로 거처를 옮기셨어요.”
“두 분이 싸우신 겁니까?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장관님은 평소 성격이 어떠셨습니까?”
최여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시던 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제 성격과 맞지 않아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두 분이 싸워서 그렇게 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요. 제 아들이 절 데리러 오기로 되어 있어요. 벌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문자를 몇 번이나 넣었군요.”
최여사의 말에 두 사람도 함께 의자에서 일어섰다. 최여사는 그곳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될 것을 짐작했다는 듯 소파 옆에 두었던 검은색 작은 가방을 집어 들고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 지현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말씀드렸다시피 전 이 집에서 50년을 살았습니다. 50년 동안 이 집에 들어온 물건은 있지만 밖으로 나간 물건은 없답니다. 장관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큰 사모님과 장관님이 쓰시던 물건 몇 개를 정리하셨어요. 그게 다입니다. 50년 동안의 일은 아직 이 안에 있습니다.”
최여사는 지현에게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았다. 멀리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