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의 에피파니(epiphany)

<문장 처방-마흔의 마음을 설명하다>

by roman editor
<나다움을 찾고 싶은 마음을 위한
문장 처방>


마음과 몸, 풍경과 도시가 잠식당하는 이때, 걷는 일은 그 장식을 차단하는 초소이고, 걷는 사람은 그렇게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공간이 파악되듯이 의미가 파악되었다. 한 장소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장소에 기억과 연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씨앗을 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장소로 돌아가면 그 씨앗의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장소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는 일은 마음을 두루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하듯,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한다.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


분주한 아침 숙제를 해치우듯 집안일을 마친 후 곧바로 책과 노트북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흐린 하늘도 반갑다. 맑은 공기 덕분이다. 오늘은 출근 경로를 바꿨다. 광화문역에서 내려 사무실이 있는 서촌으로 향한다.

오늘 아침에 읽은 리베카 솔닛(걷기의 인문학)의 문구를 음미하며 걷는다.

“마음과 몸, 풍경과 도시가 잠식당하는 이때. 걷는 일은 이 장식을 차단하는 초소이고, 걷는 사람은 그렇게 지켜야 할 것은 파수꾼이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킨다는 말, 지켜내는 파수꾼의 태도로 걸음을 재촉한다.

오늘의 걷기는 ‘무엇을 지킬 것인가’를 읽는 행위다.


따스한 봄날, 새로 돋은 작약 움, 풀 한 포기, 담벼락에 기대어 가르랑거리는 고양이, 꽃눈이 촘촘한 홍매화 가지, 먼 산, 푸른 이랑처럼 연달은 지붕들, 흰 구름. 이뿐이겠는가. 바람이 이는 순간 꽃잎 흩날리며 뻗은 벚꽃나무, 커피 향 가득 카페, 취향의 책들로 채워진 동네 책방, 어떤 이의 아담한 한옥집, 구수한 향 가득한 단골 밥집, 동네 빵집까지 그러고 보니 모두 지켜냈으면 하는 것들이다. 시간이 지나도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줬으면 하는 것들 말이다.


사무실 옆 허름한 백반집. 큼직한 꽃게가 담긴 구수한 된장찌개, 생선구이에 정갈한 반찬, 갓 지은 찰진 공깃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두둑이 채우고 나면 온몸에 온기가 돈다. 그 온기는 곧 에너지로 전환된다.

덕분에 이후의 걸음은 한결 힘차다.

2층 창문을 비집고 들어 온 벚꽃잎들로 마음까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단골 카페. 카페인에 민감해 커피를 자제하는 요즘이지만 이곳에선 무장해제다.

깊은 만족을 담은 커피가 주는 즐거움을 자제할 만할 정도로 난 의지가 강하지 못하다.

정겨운 골목이 주는 위안은 어떤가. 척척하고 울퉁불퉁함은 정겹기만 하다. 이대로 걷다 보면 만나게 될 우연한 발견의 기쁨은 덤이다.

이렇게 정겨운 골목을 걷다 보면 어느새 난 웃고 있다.

한옥 사무실. 어릴 적 한옥에서 자란 덕분에 한옥은 각별하다. 마루 끝에 내리쬐는 햇살, 살랑이는 바람은 곧 평안이다.

어지러웠던 마음, 복잡했던 마음, 찌뿌둥하던 마음들. 걸으며 말끔히 쓸어 담는다. 싸리 빗자루로 싹싹 쓸어 담는 기분. 오늘 걷기는 딱 그 기분이다. 그렇게 이곳 길을 걸으며 내 마음을 두루 살핀다. 가장 나다워지는 시간.

나다운 우연한 것들을 발견하게 된 건

오늘 이른 아침에 꾹꾹 눌러 담은 문장 덕분이다.


한 철학자가 말한 ‘히스테리성 과잉활동 시대’. 느린 것, 하지 않는 것, 멈춘 것은 곧 불안으로 이어진다.

열심히 무언가를 쉼 없이 하는 것이 ‘정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느리게 걸으며 무언가를 살피는 일’은 비정상인 행위에 가깝다. 그렇게 정상을 강요받으며 열심히 내달린 시간. 신기하게도 이젠 ‘자발적 비정상 행위’에

평안을 찾는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세상과 마음을 두루 살피는 걷기.

걷는 이유로 이보다 충만한 이유는 없다고 스스로 답한다.

가장 편안한... 그렇게 난 나다움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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