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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체조

오쿠다 히데오 나태하기를 권하노라

by 은예진

'공중그네'가 나온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니 이놈의 시간은 아무래도 접히는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슬쩍 시간을 접어 뛰어넘는 게 아니고는 이렇게 빨리 지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공중그네'는 뾰족한 걸 무서워하는 야쿠자 중간보스 이노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이노 씨는 이번에 나온 '라디오 체조 2'에도 특별출연하며 그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준다.


칼을 써야 하는 야쿠자가 뾰족한 게 무서워 벌벌 떠는 모습이라니, 이십 년이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다. 그 이노 씨는 야쿠자를 떠나 사채업자의 경호일을 한다니 축하할 일이다. 일본에서는 폭력단 대책법으로 야쿠자를 몰락시키다시피 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노 씨도 그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이십 년이 지났지만 이상한 정신과 의사 이라부와 초미니 간호사복을 입은 마유미 짱은 나이가 들지 않았다. 특히 마유미 짱 여전히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섹시한 간호사복을 입고 주사를 놓아준다니 다행이다.( 시간이 접히는 것이 틀림없는 게 이라부와 마유미 짱이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은 접힌 시간을 뚫고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있는 것이다.)


'라디오 체조'는 표제작인 라디오 체조 2를 제외하고 해설자, 어쩌다 억만장자, 피아노 레슨, 퍼레이드 이렇게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형식은 똑같아서 정신과를 가지 않을 수 없게 된 주인공들이 이라부 종합병원을 찾는다. 그곳에서 병원 로비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지하의 정신과로 내려가게 되고 의학박사 이라부 이치로를 만나 기상천외한 치료를 받는 것이다.


이십 년 전에 비해 사람들은 마음에 병이 훨씬 더 깊어졌다. 더군다나 우리는 코비드 19로 인해 평생 처음 겪는 심각한 단절과 고립을 경험하지 않았나.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은 더욱 심하게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남들과 조금 다른 측면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향이 강하다.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약속을 잘 지키고, 법은 더욱 잘 지키며 잘 살아내려 노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산다. 그렇게 누르고 누르다 결국 터져버린 우리의 주인공들에게 이라부는 권한다.


아무렇게나 살기를. 즉 조금은 나태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시간 약속을 어기고, 일을 펑크 내고, 함부로 말을 하고, 화가 나는 일에는 참지 말기를 권한다.


너무 잘하고 싶어 자신을 학대하는 모든 모범생들을 향해 이라부는 심드렁하게 처방한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마음이 편하지만 마음 편하자고 억눌렀던 진짜 내 마음을 풀어주라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미음이라고 말이다.


너무 잘하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고 조금만 나태하게 살아보면 지금껏 달리느라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것은 바로 나다. 발걸음을 늦추고 천천히 걷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를 알아야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라디오 체조'는 낄낄거리고 웃으며 보는 책이지만 다 읽고 나면 좀 안심이 되기도 한다.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욕을 좀 먹어도 그게 그다지 타격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주부들이 외치는 말이 있다. '욕이 배 뚫고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 욕먹는다고 별일 없다는 것이다. 우리 그러니까 너무 열심히 살지 말고 좀 나태하게 살아요. 이제 그래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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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해안가를 배경으로 서 있는 '라디오 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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