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함의 핑계
나는 우울증이 아닌데 우울증 약인 에나폰정 10밀리그램을 먹고 있다. 전에는 센시발정을 아침저녁으로 두 번 먹었었는데 방광통의 증세가 완화되면서 자기 전 에나폰정 하나로 줄었다.
또, 불안증이 아닌데 불안장애 약인 디아제팜을 먹고 있다. 디아제팜은 날마다 먹지는 않고 어지럼증을 급하게 진정시켜야 할 때만 항히스타민인 보나링정과 함께 먹고 있다.(날마다는 아니라고 하지만 거의 매일) 그리고 이번에 신경과에서 가나페닌캡슐 100밀리그램을 추가로 처방받았다. 가나페닌캡슐은 '뇌전증약'이다.
간질도 아닌데 뇌전증약이라니 당황스러웠다. 의사는 이 약이 무슨 약이며 왜 삼 년째 재발을 반복하는 전정신경염에 뇌전증 약을 처방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지난번에 진훈제인 메네스 정의 함량을 늘렸으나 효과가 전혀 없어 다시 낮추고 이 약을 처방한다고 했다.
대체로 해열진통제를 먹으면 통증이 가라앉고 디아제팜과 보나링정을 먹으면 심한 어지럼증은 어느 정도 진정된다. 그러니까 필요한 약을 먹으면 효과가 있고 약에 의지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나페닌캡슐이라는 약을 처음 먹으며 겪는 약의 작용에 놀라고 있다.
가나페닌은 뇌전증뿐만 아니라 신경통에도 쓴다고 한다. 나는 어지럼증의 전조로 오는 머리 무거움 때문에 판피린을 먹는다. 사실 판피린을 먹는 이유는 그것 말고도 오조오억 개다. 단지 하루에 몇 병을 먹느냐가 문제다. 평소에는 한 병 정도 먹었는데 최근 어지럼증이 심해지면서 하루에 네 병까지도 먹어봤다. 세병은 기본이고 두병 먹으면 선방한 것이다.
한 병으로 시작한 판피린이 네 병까지 늘어났으니 심각한 중독이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죽겠으니 방법이 없었다. 그냥 에라 모르겠다 자폭하는 심정으로 판피린 뚜껑을 땄다. 판피린에 항히스타민이(항히스타민은 전정신경을 억제하기 때문에 당장의 어지럼증은 잡아 주지만 장기적으로 어지럼증 치료에 방해가 된다.) 들어 있기 때문에 어지럼증에도 약간 효과가 있는 게 사실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전정신경염을 앓고 있는 엄마는 신경과에서 판피린 먹지 말라고 야단을 맞고 끊었지만 나는 끊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약사인 올케에게 호미로 막느라 판피린을 먹는데 그걸 참으면 다음날 가레인 보나링을 먹어야 하는 사태가 온다고 했더니 그냥 보나링을 먹으라고 하며 판피린 때문에 걱정했다.
그런데 가나페닌을 먹고 이틀이 지나자 판피린에 손을 딱 끊었다.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뇌가 판피린이 필요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어지럼증이 그다지 좋아진 것도 아닌데 정말 기가 막히게 판피린에 손을 대지 않고 있다. 판피린이 없으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내가 판피린을 잊어버렸다. 도대체 가나페닌이 어떻게 판피린을 끊게 만든 건지 모르겠다.
그 외에도 약간의 조증이 왔다. 어지럼증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는데 조증으로 내가 어지럼증을 이겨낼 힘이 생긴 것이다. 약을 먹고 온 약간의 조증은 신기할 뿐이다. 약의 영향을 다양하게 받아봤지만 조증은 처음이라 뭔가 표현하기가 어렵다.
내가 조증임을 인지하고 나서는 혹시 이런 상태로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해서 감당하지 못할까 봐 최대한 조심하고 있다. 약의 영향으로 조증이 온 나는 아픈 몸 때문에 느끼던 무기력함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 약을 중단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좀 걱정스럽기도 하다.
핑계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러고 사느라 어느 순간 소설을 쓸 마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작년에는 옆구리 통증 때문에 일 년 내내 항생제를 먹었다. 판피린에다 처방 약에 항생제와 소염 진통제까지 먹으니 나는 내 신장이 금방이라도 망가질 것 같아 두려움을 느껴졌다. 방광염이 오면 신장 통증까지 이어지는데 진통제를 그렇게 많이 먹으니 신장이 버텨낼까 싶었다.
겁이 났지만 당장 아픈데 도리가 없었다. 일 년 내내 항생제를 먹으면 괜찮고 중단하면 아프던 옆구리와 방광이 11월이 되면서 약도 들지 않게 아팠다. 병원에서는 염증이 없다고 하고 나는 아프다고 호소하니 이차병원에서 서울대 병원으로 전원시 켰다.
서울대 병원에서 센시발을 먹기 시작하면서 통증이 진정됐다. 그러고 나자 병원에서 매번 없다고 하던 염증 수치가 나오기 시작했다. 통증이 가라앉아 항생제를 먹지 않자 소변 검사만 하면 염증이 나왔다. 서울대 병원에서는 육 개월 후에 아이루릴 시술을 생각해 보자 했다.
서울대 병원은 내가 방광염이 왔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염증으로 인한 통증이 올라올 때 이차병원을 갔다. 이차병원에서 서울대에서 아이루릴 시술을 이야기한다고 하자 의사가 나도 하는데 그냥 여기서 해요라고 말한다. 서울대 병원은 한 시간이 걸리지만 이차병원은 집에서 십 분이면 간다.
서울대 병원의 손기술이 신의 경지이기는 한데 통원 시간의 압박도 있고 당장 받고 싶은 마음에 이차병원에서 아이루릴 시술을 받기로 했다. 아이루릴 주사는 요도에 카테타를 끼우고 직접 약을 주입하는 거다. 약은 하이루론산과 콘드로이친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들은 얼굴에 바르는 하이루론산을 나는 방광에 일회 삼십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바르는 것이다. (나는 실손보험을 병력 때문에 들지 못했고 유병자 가입이 가능해졌을 때는 너무 비싸서 들지 않았다. ㅠㅠ)
처음 아이루릴 시술을 했을 때는 하루 정도 요도가 아프고 방광 압박이 심해 계속 화장실을 가고 싶었다. 두 번째는 카테터 삽입 과정에 문제가 있었는지 피오줌을 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서울대 병원의 손기술이 필요한 거지만 빨리 하고 싶고 가까운 이점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내일 세 번째 시술인데 지금 내가 조증 상태라 이번에는 괜찮을 것 같고, 아이루릴이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희망에 차 있다.
죽지는 않지만 삶의 질을 망가트린 이런 병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나태하게 살고 있다. 이게 나의 핑계다. 그래도 그동안 쓴 소설들이 인기를 끌었다면 어떻게든 쓸 것이다. 써도 잘 팔리지 않으니 결국 핑곗거리가 필요한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전정신경염은 울고 싶은 사람 뺨을 때려준 것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계속 작업할 수 있었던 이유로 체력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