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롱의 엄마는 열여섯 살 때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을 했다. 미혼모가 된 펄롱의 엄마가 가족에게 외면당할 때 미시즈 윌슨이 거두어 모자가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비록 아버지가 없는 가사 일꾼의 자식이었지만 펄롱이 지금 성공해서 석탄, 목재상을 하고 아내와 다섯 딸을 둘 수 있었던 것은 미시즈 윌슨의 배려 덕분이었다.
야무진 아내와 예쁜 다섯 딸을 두고 부족함 없이 살던 펄롱의 삶에 작은 균열이 생긴 것은 선한 목자수녀회에서 관리하는 수녀원에 배달을 갔을 때였다. 세탁소와 직업학교를 운영하던 수녀원은 많은 소문이 돌았지만 펄롱은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시즌 별생각 없이 수녀원에 배달을 갔다 계산서를 받기 위해 카멜 수녀를 찾던 펄롱 앞에 예상치 못한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신발을 신지 않고 검은 양말에 끔찍한 회색 원피스를 입은 아이들은 눈에 흉측한 다래끼가 났거나 머리카락을 쥐어 뜯긴 듯 깎여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펄롱에게 다가와 도움을 요청했다. 자신들을 강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거기서 빠져 죽고 싶다는 거였다. 씨발 우리한테 그것도 못해주느냐고 외치는 아이의 모습에 놀란 펄롱이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펄롱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삶을 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학창 시절 온갖 놀림 속에 자라지 않았더라면 그 아이들의 모습에 덜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수녀원에 석탄과 장작 배달을 마치고 돌아선 펄롱의 마음 한구석에 수녀원에 대한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크리스마스이브날 수녀원의 석탄광에서 머리가 엉망으로 깎여있고 자신의 배설물과 함께 방치되어 있던 소녀를 발견하게 된다. 수녀원장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아이가 없어져서 한참 찾았다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펄롱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듯 수녀원장은 그의 다섯 딸들을 거론하며 은근하게 위협한다. 수녀원이 지역 사회에 가지는 권력은 막강했으며 특히 딸만 있는 펄롱에게는 더욱 영향을 미칠 여지가 많았다. 만약 펄롱이 수녀원에 위해가 가는 행동을 한다면 그의 딸들은 앞으로 수녀원과 관련된 교육을 받기 어려울 것이며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펄롱의 석탄과 목재상 일을 얼마든지 방해할 수 있다.
아내는 펄롱에게 수녀원 일은 절대 모른 척하라고 당부한다. 펄롱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외면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이 가족 곁에 머무르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 침묵은 수월하고 용기는 틀림없이 엄청난 파국을 몰고 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갈림길에서 휘청이는 펄롱의 모습을 보며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누리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펄롱에게는 너무 큰 시험이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우리는 비난할 자격이 없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이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허구다.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는 1996년까지 운영되었으며 이 시설에서 은폐, 감금, 강제 노역을 당한 여성과 아이가 3만 가량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21년 18개 시설에서만 9,000명의 아이가 사망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가톨릭 교회가 아일랜드 정부와 함께 운영했다는 시설에서 1996년까지 이러한 일이 자행되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20세기 아일랜드에서 자행되었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분노가 일었다.
소설은 분노하지 않는데 나 혼자 분노했다. 클레어 키건은 단순 명료한 문장으로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내는 명장이다. 지난번 '맡겨진 소녀'에서 보여 주었던 애틋함이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는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단편 분량의 글이 단행본으로 나오는데 대한 불만 없음을 이야기하는데 적극 동의한다. 충분히 단행본이 될 자격이 있는 소설이다.
문학이란 이런 거였지라는 생각이 든다. 멈추어 서서 고민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한 발짝 내딛는 이야기.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감히 추측해 보면 펄롱의 선택이 아닐까 싶다.
신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어휘를 접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옛날 책을 두고두고 몇 번씩 읽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신간이 보여주는 시대적 정서가 있다. 가령 유모차가 유아차가 된 것도 그렇고 하녀라는 말대신 가사 일꾼이라는 말을 쓴 것이 그렇다.
넷플릭스의 political correctness를 위한 억지스러움에는 종종 눈살이 찌푸려진다. 나는 동성애에 큰 반감이 없지만 넷플릭스 드라마에 무조건 양념처럼 끼워진 동성애 커플에는 짜증이 난다. pc를 위해 일부러 넣었다는 게 보이는 그 억지스러움이 거북하다.
그럼에도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노력하는 번역에 눈길이 갔다. 신간을 읽지 않으면 이런 변화에 뒤처진다. 따라가려 애쓸 필요는 없지만 굳이 멈출 이유 또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