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에 비가 많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23일 제주도행이 계획되어 있던 우리는 일기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다행히도 우리가 여행하는 이박 삼일은 비가 소강상태라고 나왔다. 딱 맞춘 기막힌 날짜 선택이었다. 큰 비와 비 사이 잠시 흐린 하늘만 계속되는 날은 덥지도 않고 걷기에 좋았다.
치매 때문에 걱정 근심이 사라져 삶을 무조건 즐기기만 하는 엄마와 함께 계획된 여행이었지만 갑작스럽게 어지럼증이 시작된 엄마는 출발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세 자매만 가는 여행이 되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렇게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머리가 복잡해서 집을 떠나고 싶었던 둘째에게는 황금 같은 시간이었고 이렇게 가지 않으면 해외는커녕 제주도 갈 생각도 하지 못하는 나에게 소중한 추억이었다. 그리고 여행의 기획자인 셋째는 제주도에서 학업을 마친 딸을 데려오는 시간이었으니 이모저모 필요한 여행이었다.
숙소인 덕천 연수원은 지금까지 가본 어떤 숙소보다 아기자기하고 힐링이 되는 공간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느긋하게 천천히 움직였다. 언니를 배려한 일정에 나는 부담 없이 걷고, 먹고, 누렸다.
덕천 연수원은 식당과 카페가 저렴해서 가성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여행 기획자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다. 동생은 카페 팥빙수가 7,000원이라 이틀 연속 반드시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여름 팥빙수 필요량은 여기서 모두 채운 듯하다.
도착하자마자 제주도에 가면 꼭 가보고 싶었던 사려니 숲길을 걸었고, 오후에는 덕천 연수원에 있는 인피니티풀을 즐겼다. 다들 수영을 할 줄 아는데 진즉에 배워놓지 못한 나는 겨우 뜨는 걸 해보느라 허우적거렸다. 엄마는 수영과 운전을 즐기며 당신이 가장 잘한 일로 손꼽았는데 나는 엄마도 잘하는 수영을 배우지 못하고 늙어 버렸다.
섭지코지 끝에서 만난 안도 다다오의 건물. 수국과 어우러진 풍경이 눈길을 끈다.
바다를 건넜다는 것은 아무래도 내륙과 다르기는 다른 모양이다. 제주도에서 만나는 풍경들은 대단히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무언가 좀 퇴락한 듯한 느낌, 이제는 한물 간 스타의 모습을 보는듯한 제주도지만 그럼에도 나에게는 새롭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촌놈이라 제주도의 자연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지만, 내륙 중에서도 내륙인 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 아열대 수종이 가득한 제주도의 숲은 신비롭게 다가온다.
에코랜드의 버베나
수국 천지에서 건너편에 있는 버베나 숲을 바라보는 동생 (키가 175CM다.)
요즘 같은 세상에 보기 드물게 해외여행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는 크게 아쉬울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여행 가는 일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성격 탓도 있으려니와 여행은 주로 모임에서 많이 가는데 모임이 없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직장에 아쉬운 소리 하기도 싫었고 목돈을 쓰기도 싫었다. 이 또한 나의 선택인 것인데 셋째 동생은 내가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한 것에 압박감을 느끼고 자기가 나서서 가까운 일본이라도 꼭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가면 좋기는 하다. 아무리 조심조심 나태한 일정으로 다녀도 돌아와서 컨디션이 회복하는데 일주일은 걸리지만, 삐끗하다가는 다시 어지러워질까 봐 조마조마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젊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한데 이 또한 내가 선택한 삶이다.
나는 여전히 여행지에서도 부지런하고 싶다. 부지런히 움직여서 빨리 숙소로 돌아오고 싶다. 돌아와서 쉬어야 햐니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게 부지런한 건지 나태한 건지 잘 모르겠다. 빨리 움직여서 얻은 시간을 쉬고 싶은 마음이다.
숙소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맞은편 좌석에 여행온 네 명의 중년여성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기다란 셀카봉을 들고 네 명을 담기 위해 움직이다 아쉬웠는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동생에게 셀카봉을 내민 여자는 느닷없이 '이것 좀 눌러주세요.'라고 말했다. 그 톤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그녀의 태도에 당황한 동생이 '거기까지 가서요?'라고 물었다. 여자는 당연하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순간적으로 어버버 하다 그녀를 따라가 셀카봉을 눌러주고 돌아왔다.
동생이 좌석에 앉자마자 내가 별 꼴을 다 보겠다는 투로 저 여자는 부탁을 해본 적인 없는 모양이라고 소곤거렸다. 동생이 자기도 그녀의 태도에 너무 당황해 '거기까지 가서요?'라고 물어본 것이라고 했다. 그 질문에는 지금 내가 움직여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 맞는 건지 확인한 것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톤 앤 매너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 같은 말도 부탁조가 있고 명령조가 있으니 그건 어조의 문제다. 톤 앤 매너를 우리말로 하면 어조와 태도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톤 앤 매너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그녀는 우리에게 도대체 평소에 어떤 태도로 살기에 저런 어조로 부탁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흉을 잡혔다.
가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서두가 너무 길어서 짜증 나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항상 말은 두괄식으로 하라고 한다. 하지만 저렇게 매너 없이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 버리면 상대방을 당황시킨다. 두괄식도 적당히 해야 하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