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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없는 건 그것만은 안 되겠어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by 은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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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니 자주 도대체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 애먹는다. 언제는 이유가 있어서 살아온 사람처럼 살아야 할 이유가 없음에 집착하고 사라지고 싶은 욕망에 허덕인다. '죽은 자의 집 청소'를 끝까지 읽어내지도 못한 주제에. 자살이 얼마나 민폐인지 잘 알면서도 고단한 하루하루가 이제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날들이 많다.


그런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여전히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지만 죽지 말아야 할 이유는 있다.


아직 부모님이 두 분 모두 살아계시고, 만삭인 딸이 있고, 매사에 나에게 의지하는 남편이 있으며 나의 안부를 걱정하는 형제자매가 있다. 내가 죽으면 나는 그것으로 끝이지만 남은 사람들의 삶에 균열을 만들고 그들의 평화를 깰 것이다. 나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는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민폐가 되고 싶지 않아서 죽고 싶은데 죽으면 더 큰 민폐가 될 것이다.


그러니 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낼 것이다.




드라마를 보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어쩌다'이다. 아무리 인기 있는 드라마라도 어쩌다 접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만남이 없으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렇게 만난 드라마가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이었다.


복 씨 집안은 초능력 가족인데 현대인의 질병에 걸려서 그 초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설정이 재미있었다. 예지몽을 꿔서 로또나 주식으로 부를 일군 복만흠 여사는 불면증에 걸렸고 행복했던 시절로 타임슬립이 가능한 복귀주는 우울증에 걸려 과거로 갈 수 없으며 하늘을 나는 복동희는 비만으로 인해 떠오르지 못한다.


그 초능력 가족에게 나타난 구원자 도다해. 복만흠 여사는 도다해가 구원자라고 확신해서 그녀를 집에 들였고 아들 복귀주와 결혼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도다해는 결혼 사기꾼. 결혼식장에서 자신이 사깃꾼임을 고백하고 떠나버린다.


우울증에 걸려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던 복귀주가 도다해를 만나면서 다시 회귀가 가능해졌는데 그 회귀는 어쩐 일인지 그녀가 있는 장소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회귀한 과거에서는 유령처럼 존재할 수밖에 없어서 무력했던 복귀주가 도다해의 눈에만 보이고 도다해의 손만 잡을 수 있다.


복귀주와 도다해 사이는 13년 전 도다해가 죽을뻔했던 화재 현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시작과 끝이 메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이야기다. 복귀주는 어떻게 해서든지 13년 전 도다해를 구해야 한다. 그녀에게 가야 하는 복귀주의 운명은 그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


도다해라는 이름은 어쩌면 도달해에서 나왔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복귀주가 도달해야 할 곳은 그녀였기에 말이다.


12회까지의 짧은 드라마였고 꽤 허술한 부분도 많았는데 나는 이 드라마에 빠져 있었고 9회 마지막 장면에서 울고 말았다.


복만흠 여사는 복귀주가 13년 전의 도다해를 구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예지몽을 꿨다. 도다해는 어떻게 해서든지 사랑하는 남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위장해서 사라지고자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녀가 사라진다면 복귀주가 도다해를 구하러 13년 전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례 그렇듯 우리의 복귀주는 숨어있는 도다해를 찾아냈다. 복귀주가 과거로 회귀했던 사이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고 자신을 놓아버린 채 살았던 것을 알면서 도다해는 잔인하게도 같은 방법으로 그를 떠났다. 교통사고를 위장해 강물에서 행방불명된 것이다.


도다해를 찾아낸 복귀주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했을 때 그녀는 파도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겨우 숨만 붙어 있어도 좋으니까 그렇게라도 니가 살았으면 좋겠어. 니가 없는 건 그것만은 안되니까."


이야기에 푹 빠져있던 나는 도다해가 복귀주에게 하는 말을 마치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었다. 겨우 숨만 붙어 있어도 좋으니까 니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는 그 목소리에 울컥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내가 죽으면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는 사람들이란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은 거니까 말이다. 나한테 주어진 이생을 살아내기 위해 오늘도 사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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