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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엔 그냥 스쳐 가기만 해요

패스트 라이브즈

by 은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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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자 정미조의 '다음 생엔 그냥 스쳐 가기만 해요'라는 제목의 노래가 떠올랐다.


먼 옛날 우리가 처음으로 사랑을 하고

먼 훗날 서로가 마지막 인사 나누려 할 때

주위엔 아무도 없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자람 없이 하나 남김없이

오롯이 그대에게 말할게요


고마웠다고 미워도 했다고

참 많은 꿈 속에 그댈 만났었다고

행복했다고 온 세상에 당신만 가득했으니

다음 생엔 그저 쉬어 가려고 해요.


https://youtu.be/VZMekx7YDV0?si=k4Y5e3MRbvOHQPEu


나영과 해성은 그렇게 이번 생에서는 스쳐 가기만 했다. 인연이라는 것에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은 공간이고 그 공간이 다른 두 사람은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노라가 된 나영이 남편 품에 안겨 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생의 감정들이 밀려왔기 때문이리라.


초등학생인 나영과 해성은 단짝 친구였다. 나영은 해성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엄마에게 할 만큼 친구가 좋았다. 하지만 영화감독인 아빠가 캐나다로 이민을 결정했고 두 아이는 마지막 공원 데이트를 끝으로 헤어지게 된다.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않는 나영에게 화가 난 해성은 말없이 걷기만 하다 잘 가라는 말을 던지고 돌아선다.


그리고 12년 후, 군대를 다녀온 해성이 온라인상에서 나영을 찾는다. 이제 노라가 되어 캐나다를 떠나 뉴욕에 정착해 글을 쓰고 있던 그녀는 반가운 마음에 해성에게 연락한다. 두 사람은 화상으로 대화를 시작하고 어린 시절을 공유하며 우정도 아니고 사랑도 아닌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 애매한 감정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노라였다. 어린 시절 한국을 떠났고 성인이 되어 또다시 캐나다를 떠나 뉴욕에 정착한 그녀는 작가로 성공하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그런데 해성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검색하고 있는 자신을 견디기 어려워졌다.


해성은 노라가 한국으로 오기 바랬고, 노라는 해성이 뉴욕으로 오기 바랬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상황은 그럴 수 없었고, 그런 결심을 할 만큼 극적인 감정도 아니었다. 이번 생에는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다시 12년 후, 급작스러운 해성의 연락에 노라는 당황했다. 마지막 연락 후 노라는 뉴욕에서 작가로 자리 잡았고 같은 예술가 레지던스에서 만난 백인 남자 아서와 결혼도 했다. 해성은 뉴욕으로 휴가를 오는 거라고 했지만 노라의 남편은 눈치 빠르게 그가 노라를 만나기 위해 온다는 것을 간파했다.


영화의 첫 장면은 그렇게 시작된다. 뉴욕의 어두운 바에서 노르스름한 조명아래 세 사람이 술잔을 놓고 앉아 있다. 왼쪽에는 해성, 가운데는 해성에게는 나영, 아서에게는 노라인 그녀가 그리고 오른쪽에 백인인 아서가 있다.


해성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 나영의 표정이 너무나 다정하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흘끔 거리며 저 세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궁금해한다. 그리고 영화 후반 다시 한번 그 장면이 나오면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아서를 배제시키고 해성과 노라에게만 집중한다. 시청자는 화면에서 배제된 아서 때문에 어쩐지 조마조마하다. 남편을 저렇게 소외시켜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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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만에 만난 어린 시절의 친구니까 이해해주고 싶지만 그럼에도 아서의 입장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아서는 스스로 자조하듯 두 사람에게 자신이 빌런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노라에게 이번 생의 인연은 아서였지만 모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 유년기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해성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24년 만에 만난 해성과 노라는 그렇게 뉴욕의 명소를 다니며 12년 전과 그전 또 다른 12년 전을 이야기하며 스쳐가야 하는 이번 생의 만남을 정리한다. 해성을 택시에 태워 보낸 노라가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남편 품에 안겨 울 때 비로소 이번 생의 인연은 아서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이 영화의 감독 셀린 송은 넘버쓰리 송능한 감독의 딸로 '패스트 라이브즈'는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로 쓰고 있다. 삶의 터전을 두 번 옮겨 뉴욕에 정착한 셀린 송에게 스쳐 지나간 인연이 어디 해성 하나뿐이었을까. 그녀는 해성이라는 특정 인물을 통해 실은 두고 온 이들에 대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련했던 첫사랑을 완성형으로 떠나보낸 그녀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갈 것이다.




@ 그런데 장기하는 거기서 왜 나오세요?

해성의 친구로 나오는 장기하는 술집에서 연신 술을 마신다. 정말 장기하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맞다. ㅋㅋ


@ 아서에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고 부부는 팔천겁의 인연이 쌓여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한 노라는 잠시 후 그 말은 한국에서 남녀 사이에 작업할 때 쓰는 대사 일뿐이라고 한다. 작업할 때 쓰는 말이 맞기는 하는데 이상하게 사랑에 빠지만 자꾸만 그 많은 경우의 수를 거치고 거쳐 그 사람을 만나게 된 것에 이유를 찾고 싶어 진다.


사랑에 빠진 연인은 과거의 행적들이 모두 상대를 만나기 위한 과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연인을 뒤집으면 인연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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