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볼트 테일러 지음
37살의 질 볼트 테일러는 뇌 과학자이면서 전미정신질환자협회의 최연소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조현병을 앓는 오빠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뇌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녀가 뇌 과학자가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현병 환자들의 뇌를 기증받아 연구에 쓰일 수 있도록 노래를 불러가며 홍보에 매진하는 그녀의 모습은 열정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질 볼트 테일러는 그냥 전도유망한 과학자일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녀의 미래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뇌 과학자가 뇌출혈을 일으키다니 그것도 37세의 젊은 나이에! 너무 드라마틱해서 어이없는 일이었다.
1996년 12월 10일 아침 7시 질이 자기 몸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병원에 들어갈 때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한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너무 현실감이 느껴져 속이 울렁거린다. 눈 안쪽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빛에 예민해지는 느낌, 이어서 몰려오던 갖가지 이상 징후가 너무 실감 나게 묘사되어 읽는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을 지경이다.
질이 느낀 그날 아침의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도 2021년 12월 15일 전정신경염으로 쓰러지면서 겪었던 고통이 너무 강렬해서 더욱 질의 그날 아침을 읽기 버거웠다. 처음에는 속이 메슥거리고 조금 어지러워 이석증이 재발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웠다 일어서는 순간 세상이 뒤집혀버렸고 나는 미친 듯이 토하기 시작했다. 몸은 균형을 잡을 수 없었고 끊임없는 구토가 이어졌다.
119 대원에게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데 현관까지 걸어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 갔는지 모르지만 가는 걸음마다 구토가 이어졌다. 너무 빠른 속도로 토하다 보니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병원에 실려가서 하루가 지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검사가 이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테로이드를 하루 열 알씩 먹고 디아제팜을 10미리씩 정맥으로 맞으며 일주일간 침대에서 혼자 힘으로 일어날 수 없었다. 혼자 힘으로 몇 발짝을 걷는데 일주일이 걸렸고 그제야 퇴원할 수 있었다. 한 달을 누워 있었고 일 년을 비틀거렸다. 그리고도 여전히 나는 어지럽다.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나빠졌고 오늘도 아침 출근길 갑작스럽게 세상이 흔들리는 바람에 핸들을 움켜쥐고 진땀을 흘렸다.
그날 이후 나는 성취보다는 견디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뇌졸중씩이나 겪었던 질은 8년간의 회복 시간을 거치며 걷기, 말하기, 읽고 쓰기 등 한 단계씩 뇌의 기능을 되찾았다. 그러니 병은 핑계가 되지 못한다. 사십 대에 파킨슨 병을 앓기 시작한 김혜남 선생님이 발병 이후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나열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저 나태한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질은 수술 이후 유아기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걷는 법, 말하는 법, 읽는 법, 숫자 세는 법, 색깔 보는 법등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모두 새롭게 배워야 했다. 얼마 전 사고를 당해 뇌수술을 했던 우은빈 작가가 (나는 멈춘 비행기의 승무원입니다 저자) 말하는 증상들과 비슷했지만 뇌출혈의 정도가 심했던 질의 경우가가 훨씬 심각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극복하려는 의지. 어떤 사람들은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공부밖에 모른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일단 성실하고 목표지향적이다. 승무원을 그만두고 국민은행에 취업할 수 있었던 우은빈 작가나 하버드대 연구원이었던 질 볼트 테일러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적극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공부하듯 병을 이겨냈고 지금도 이겨내는 중이다.
그동안 자신들이 쌓아온 커리어가 모두 무너지는 상황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큰 몫을 하는 것은 기록이다. 영상으로 기록을 하든지 글을 쓰든지 상관없다. 기록을 통해 그들은 하루하루를 이겨냈고 다시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우리 뇌는 신비해서 망가진 부분을 다른 부분이 대체할 수 있게 해 준다. 나 또한 망가진 전정신경은 복구되지 않는다. 소뇌가 대신할 뿐이다.
질 볼트 테일러는 좌뇌 출혈로 언어 능력, 기억능력을 잃었다. 순차적 사고도 어려워서 경험의 과거,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지 못했다. 좌뇌가 제 기능을 못하자 우뇌가 두배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평온하고 차분한 의식이 밀려들면서 열반과 같은 희열에 빠져들었다.
좌뇌가 행하는 의식이라면 우뇌는 존재하는 의식이다. 명상할 때 말하는 진정한 나란 우뇌의 내가 아닐까 싶다. 질은 좌뇌를 다쳐 우뇌가 활성화된 상태에서 감정의 짐을 내려놓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좌뇌를 다치지 않았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좌뇌를 잠재우고 우뇌의 의식을 깨워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뇌를 활성화시킬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을 제시했다. 매사에 고마워하면 당신의 삶은 정말 멋질 것이라고 말한다. 별거아닌 것 같지만 감사하는 마음, 남을 위한 작은 행동들은 만병통치 주문으로 쓰인다. 결국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