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칼의 모델 오디션 장면에서 시작한다. 오디션 장에서 칼을 향해 심사위원들이 하는 말.
"보톡스 맞아야겠는데. 슬픔의 삼각형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그들은 미간의 주름을 슬픔의 삼각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영화는 시종일관 그 미간 주름이 잡히는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가령 오디션장에서 인터뷰 나온 기자는 모델들에게 h&m 포즈와 디오르 포즈에 대해 요구한다. h&m 포즈는 경쾌하고 밝게 하지만 디오르 포즈는 거만하고 도도하게.
칼의 연인 야야는 인플루언서로 패션쇼에 서기도 하고 협찬받은 행사에 다니며 사진을 올리는 아름다운 여성이다. 칼은 야야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레스토랑에서 음식값을 내지 않으려 하는 사실에 분개한다.
얼마 전 식당에 갈 때마다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여친 때문에 화가 난 남자 이야기를 포털에서 읽은 적 있는데 딱 그 경우다. 매번 잘 먹겠다는 여친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는 남자와 먹을 때면 으레 하는 인사인데 그 인사 때문에 남자가 화를 내는 걸 이해할 수 없다는 여자의 입장 차이가 보이는 글이었다.
그걸 성 평등이 확실해 보이는 스웨덴 영화에서 보다니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트에서 성 평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씀. 야야는 잘 먹었다는 인사에 의도가 있었음을 인정하지만 포털에 등장한 여자는 절대 아니라고 끝까지 우겼다.)
영화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계급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야야와 칼이 협찬으로 참여한 고급 크루즈 여행은 부자들의 향연이다. 그리고 그 부자들을 위해 움직이는 요트의 직원들은 '머니'를 외치며 서비스를 다짐한다.
넘치도록 돈 자랑을 하던 부자들이 뱃멀미를 하며 황금빛 토를 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느낌이다. 흔들거리는 배와 끊임없이 솟구치는 토사물은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황금빛 구토물의 결과는 배의 폭발까지 이어졌고 야야와 칼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만이 살아남아 무인도에 도착한다. 이제 모든 것이 변했다. 무인도에서는 롤렉스 시계와 다이아몬드 반지는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구명보트와 문어 다리 하나만도 못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비료 사업으로 부자가 된 러시아인 디미트리와 돈 자랑하던 IT 사업가는 불조차 피우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들이다. 그런데 침실 청소를 하던 애비게일은 낚시로 고기를 잡을 줄 알고 불을 피울 줄 안다. 그녀가 섬의 캡틴인 된 것이다. 새로운 계급 사회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야기의 흐름은 생각보다 참신했고 결말은 중간중간 느꼈던 지루함을 상쇄할만했다. 이런 예상치 못한 이야기라니. 너무 늘어놓기만 하고 주워 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걸 마지막 장면에 일소시켰다.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에서 보듯 완장을 채워주면 사람은 누구나 자리에 걸맞은 행동을 한다는 것처럼 애비게일은 자신이 캡틴이 된 이후로 전횡을 휘두르며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열린 결말이지만 파국이라는 건 짐작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애비게일의 욕심은 헛된 게 아닐까? 지속 가능하지 않은 완장을 위해 너무 큰일을 벌인 게 아닌가 싶다.
'슬픔의 삼각형'을 이야기하며 '기생충'을 거론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뚜렷한 계급관 과 하위 계급에서의 충돌은 기생충을 연상시키기는 한다. 하지만 기생충보다는 훨씬 허세적이며 서사로 보여주지 못하고 직접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인상적인 영화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너무 많은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무감각해질 대로 무감각해진 내가 긴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