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두 권을 모두 읽고 나자 나는 마치 조신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너무 집중해서 읽은 탓일까. 선자가 되어 그녀의 한평생을 살아낸 것만 같은 피로감에 팔다리가 쑤시고 아팠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 우리가 문학을 읽는 까닭은 우리의 생이 한번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내는 간접경험을 위해 문학을 읽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파친코를 읽고 나서 온몸으로 느낀 피로감은 선자와 그녀의 자식들, 손자까지 타국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그네들의 삶이 너무 아파서였을 것이다.
평소에 전자책은 가독성이 떨어져 읽을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파친코는 그 서사의 유려함에 몰입도가 강했다. 전용 리더기도 아니고 태블릿도 아닌 핸드폰으로 전자책을 보면서도 한 문장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모두 꼼꼼하게 읽었다.
부산 영도에서 언청이에 다리를 저는 아버지와 평범한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선자는 어릴 때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비록 뱃사람들에게 하숙을 쳐서 먹고사는 형편이지만 성실했던 부모는 선자 배를 굶기지는 않고 키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둘이서 하숙을 치던 선자는 장을 보러 나간 부산에서 하얀색 양복과 모자, 구두까지 맞추어 신은 남자를 보게 된다. 그 남자 고한수와 선자의 운명은 그렇게 얽혀 들었다. 고한수의 아이를 가졌지만 아내와 세 딸이 있다는 말에 단호하게 돌아서는 선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랑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추호도 부끄럽게 첩 노릇을 하며 살지는 않겠다는 그녀의 다부진 모습은 고한수가 평생 그녀의 곁을 맴돌며 안타까워할 만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아비도 모르는 자식을 가진 딸 때문에 상심에 빠져있던 선자의 어머니는 하숙집에 신세를 지고 있던 목사 백이삭에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는다. 백이삭은 오사카로 가는 도중 들른 하숙집에서 결핵이 재발해 선자 모녀에게 간호를 받고 몸을 회복 중이었다. 이삭은 목숨을 빚진 모녀를 위해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주기로 결심하고 선자와 결혼을 한다.
선자는 이제 이삭을 따라 낯선 땅 오사카로 떠난다. 애플 티브이에서 파친코 1부를 방영한 지 좀 되었던 터라 내용은 모두 알고 있었다.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유튜브에서 요약본이 워낙 많기에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성으로 읽게 되지 않았던 것은 소설이 드라마와 시너지를 일으키며 눈으로 읽은 장면에 배우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고한수와 선자의 모습은 그대로 이민호와 김민하 배우의 모습으로 오버랩되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선자가 고한수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오글거렸고 오사카에서 만난 손윗 동서인 경희에게 형님이 아닌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했다. 드라마에서처럼 형님이라고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비록 아비 없는 자식을 낳아 키우는 수모를 겪지 않았지만 오사카에서 백이삭의 아내로 사는 것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큰아들 노아를 낳고 동생 모자수까지 낳아 가정을 일구며 열심히 살았지만 이삭이 신사참배 문제로 잡혀가 이년 만에 풀려났지만 병들어 죽고 말았다.
이삭의 형 요셉은 가부장적인 사내로 여자들이 일을 하도록 놔둘 수 없다고 했지만 그가 혼자 벌어서는 도저히 동생의 처와 아이들까지 먹여 살릴 수 없었다. 선자는 형님 경희와 김치를 만들어 팔며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그녀를 돕는 고한수가 있었다.
이야기는 그렇게 일본 땅에서 산 조선인들이 얼마나 많은 차별과 따돌림, 학대 속에서 살아남은 것인지 보여준다. 노아의 비극도 모자수의 아들인 솔로몬의 좌절도 결국 끝나지 않는 일본인들의 차별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삼대째 일본에 살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한국말을 잘하지도 못하는 솔로몬도 결국 일본의 주류 사회에 편입을 거절당하고 아버지가 하는 파친코 사업을 물려받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드는 것이 현실이었다. 모자수는 아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어둠의 세계에서 빠져나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솔로몬은 자신의 뿌리를 인정하는 선택이 파친코임을 알았다.
아무리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해도 파친코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자이니치(일본 거주 한국인)나 하는 천한 일이었다. 솔로몬은 끝내 부정하고 싶었지만 에이즈로 죽어가던 첫사랑 하나의 충고로 마음을 돌린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났다. 고한수는 마지막까지 선자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해 안타까웠다. 그가 아무리 나쁜 남자라고 하지만 부산에 있던 선자의 어머니 양진을 선자 곁으로 데려다주었을 때 나는 그를 더는 미워할 수 없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선자를 보살폈고 자신의 아들을 지키고 싶어 했다.
자신의 생부가 고한수임을 알고 충격받은 노아가 숨어 버렸을 때 12년 만에 아들을 찾아낸 고한수는 노아를 그냥 내버려 두고 싶었다. 선자가 아들을 향해 달려갈 때 고한수는 그 일이 파국이 될 것 임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선자부터 고한수 이삭과 요셉, 마지막 솔로몬까지 그들 모두 역사의 희생자였다. 그렇다고 모든 삶이 희생 만으로 점철된 것은 아니니 그들은 그냥 살아낸 것이다. 우리 모두 여기에서 이렇게 살아내고 있듯 말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의 조신의 꿈을 꾸듯 그들의 삶이 실제인지 허구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다. 뛰어난 문학이 주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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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수가 어두운 세계의 사람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가 얼마나 잔혹한 사람인지 선자와 관련된 일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딱 한 장면. 모자수의 아내 유미가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 간 고한수는 차에 젊고 예쁜 아가씨를 두고 갔었다.
그 아가씨가 기다리다 지쳐 고한수를 급하게 불러내 쇼핑을 가자며 졸랐을 때 그는 여자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렸다. 이삭이 노아와 모자수를 같이 사랑했듯 고한수도 모자수를 아꼈기에 그의 상처에 마음이 아팠던 고한수는 철없는 아가씨의 투정에 잔혹하게 대응했다. 그 한 장면으로 고한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