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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낙엽을 타고

by 은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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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게 좋은 소규모 외국 영화는 대부분 '찬란'에서 수입한다. 그리고 찬란을 지원하는 곳은 소지섭의 소속사 51K다. 영화가 시작할 때 종종 공동제공으로 51K가 보이곤 하는데 그럴 때면 소지섭에게 남다른 마음이 든다. 뭔가 그가 영화에 가지는 진심이 보인달까.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찬란에서 수입했고 51K가 공동제공한 영화다. 그리고 2023년 타임지 선정 최고의 영화 1위를 차지했다.


영어가 아닌 낯선 언어가 들리는 영화는 조금 접근성이 떨어진다. 영어를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 익숙함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영어를 하는 건 더 참기 어렵다.) 그러니 미국인들이 자막 영화를 보지 못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네덜란드 영화인줄 알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헬싱키를 암스테르담과 혼동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영화 도중 등장인물이 마약 거래로 체포되는 장면을 보고 아니구나 싶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핀란드 영화다. 프롤레타리아의 암울한 현실을 영화로 만들어 온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이영화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그의 핀란드 삼부작으로 유명한 '어둠은 걷히고', '황혼의 빛', '과거가 없는 남자'는 모두 노동자들의 삶과 연대를 통한 희망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또한 핀란드 삼부작처럼 노동자들의 척박한 삶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여주인공 안사는 유통기한이 지난 폐기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다 감독관에게 들키고 만다. 감독관은 그녀의 가방을 뒤져 폐기 빵을 가지고 나가는 것을 문제 삼아 해고한다.


해고당한 안사는 구직 사이트를 뒤져 카페 설거지 담당으로 취업하지만 주급을 받기로 한 날 사장이 마약 거래로 체포된다.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그녀가 새롭게 취업한 곳은 우리가 흔히 여자가 일한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금속 공장이었고 거기서 안사는 작업복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날마다 버거운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 안사가 친구와 갔던 노래주점에서 만났던 홀리파를 카페 사장이 체포되는 현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홀리파의 데이트 신청에 두 사람은 영화를 보고 헤어지면서 안사는 자신의 이름을 다음에 알려주겠다며 전화번호를 남긴다. 하지만 홀리파는 실수로 그녀의 번호를 날려버리고 만다.


안사와 마찬가지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홀리파는 술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우울해서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니 다시 우울한 삶을 계속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홀리파는 친구에게 그녀와 결혼을 할 수 있었는데 전화번호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끝났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며 아쉬워한다.


그렇지만 주인공들은 반드시 만나는 법. 결국 두 사람은 다시 만나 데이트를 하게 되지만 홀리파의 음주 때문에 헤어진다. 아버지와 오빠를 술 때문에 잃은 안사는 술 마시는 남자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척박한 노동자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주고 싶어 하는 감독은 이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 줄 터이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온다고 하지 않는가. 걱정할 것 없다. 홀리파는 술을 끊을 것이고 안나는 우연히 만난 유기견을 챙기며 조금 더 온기 있는 삶을 꾸려 나갈 것이다. 힘든 일을 하고 불안한 삶을 살지만 그들의 삶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영화는 지금까지 내가 본 여타 영화들과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가졌다. 연기자들의 연기는 의도적으로 뻣뻣하고 배경은 1980년처럼 느껴진다. 라디오에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이 계속 흘러나오는데 벽에는 톰존스 포스터가 붙어있고 핸드폰이 있기는 하지만 오래된 폴더폰이다. 거기다 전쟁 소식이 들려오는 라디오는 안테나가 달린 추억 속의 커다란 라디오다.


PC방처럼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곳에서는 돈을 받고 노트북을 빌려준다. 그러니까 핸드폰과 노트북이 있기는 있는 시대이고 러우전쟁으로 시간적 배경을 알려주고 있음에도 분위기는 너무나 오래된 느낌이라 빈티지 영화라는 말이 어울린다.


어쩌면 그런 면이 영화의 매력인지 모르겠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팍팍한 노동자 남녀가 서로 만나 위로하고 희망을 가지는 이야기는 너무 흔한 스토리다. 어차피 세상에는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 새롭게 보여주는 방식만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는 미장센으로 풀어가고 있다.


술을 모두 변기에 내려버린 홀리파가 앞으로도 그 결심을 지킬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사람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그녀와 살면서 그렇게 많이 마시던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살았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 빨리 죽는 바람에 그는 다시 예전의 술꾼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진짜 사랑이 곁에 있는 동안 술을 마시지 않을 수 도 있다는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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