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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타이밍

by 은예진

육 개월에 걸친 드라마 촬영이 끝났다. 시청률이 고공행진을 하는 바람에 우혁이 앞으로 찍어야 할 광고가 이십 개 이상 잡혔다. 드라마 끝나면 신혼여행을 갈 수 있을 줄 알았던 우혁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서아의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했다.


“이 시기 지나면 또 한가해지니까 조금만 참아.”

“나 괜찮은데. 르 꼬르동 블루 대신 국내 유명 선생님들 찾아다니며 디저트 공부하고, 만들어서 선물하고, 집 관리하고, 시간 나면 채영 언니랑 쇼핑도 하고…….”


서아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우혁은 시무룩해졌다.


“정말 하나도 안 힘들어?”

“응. 왜 힘들어?”

“하. 억울하다. 왜 나만 힘든 거냐? 나는 너랑 같이 여행도 가고 싶고 백화점 식품관 가서 꼬치로 떡갈비도 먹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힘든데.”


서아가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린 채 큭큭 거리고 웃었다. 웃음을 감추기 위해 애를 쓰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대놓고 배를 잡고 웃었다.


“뭐야? 왜 웃어?”

“오빠 지금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서.”

“서방님이 슬퍼 보이면 너도 같이 슬퍼해줘야지 그게 배꼽 쥐고 넘어가게 웃을 일이냐?”

“미안해. 하지만 오빠 얼굴 진짜 웃겨.”


우혁이 정말 삐졌다는 듯 몸을 휙 돌리자 서아가 재빨리 그의 등을 껴안았다.


“사실은 나도 많이 힘들어. 하지만 우혁 오빠가 오랜만에 드라마 하는데 그거 가지고 슬퍼할 수 없잖아. 나는 혼자 있느라 힘든 거보다 오빠가 잘 나가서 기쁜 게 훨씬 좋은데.”


우혁이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 봤다.


“고마워. 서아야.”


서아가 까치발을 떼고 우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려는 순간 우혁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우혁은 무시하려 했지만 서아가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다. 전화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집요하게 울렸다.


“누군지 안 받으면 적당히 넘길 것이지 눈치 더럽게 없네.”


우혁이 투덜대며 무선 충전기에 올려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끊어졌던 벨이 다시 울린다. 발신인을 확인한 우혁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서아는 우혁의 얼굴이 저 정도로 일그러질 때는 정말 그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혁을 그렇게까지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차현준?”


우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운동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 전화가 다시 끊어졌다. 우혁은 부재중 전화 표시가 떠 있는 핸드폰 액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는 더 오지 않고 문자가 들어왔다.


<지금 집에 계시지요? 제가 마침 한남동에 볼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집으로 초대해 주신다면 더 좋겠지만 뭐 그럴 마음은 절대 없으실 것 같아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카페 주소 보내드립니다.>


문자를 확인한 우혁은 내가 널 만나야 할 이유가 없다는 문자를 썼다가 다시 지웠다. 답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우혁의 답이 없자 차현준이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나오고 싶지 않으셔도 이 사진을 보면 마음이 바뀌실 겁니다.>


우혁은 사진을 보고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핸드폰은 러닝머신에 부딪치며 튕겨져 나갔다. 심장이 핸드폰과 같이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다. 핸드폰을 주우려는 손이 자꾸 헛돌았다. 겨우 핸드폰을 집어 들자 액정이 깨져있었다. 거미줄처럼 갈라진 검은 액정 속에는 사진 속 남자와 똑같은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우혁은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서아가 서둘러 나가는 우혁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우혁은 굳은 얼굴을 억지로 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 녀석이 하도 만나달라고 보채니 한번 얼굴 보여줘야지. 차현준이는 아무래도 나 좋아하나 봐. 그러니까 이렇게 스토킹을 하지.”


우스갯소리가 하나도 웃기지 않은 서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별일 없어. 내가 혹시라도 저에 대해 소문낼까 봐 한 번씩 확인받고 싶은 거야.”


그제야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현준이랑 헤어지면 바로 들어와. 밥 해놓고 기다릴게.”

“응.”


우혁이 서아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비게이션에 카페 주소를 입력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경비실을 지나 타운하우스를 벗어나자 차현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저 여기 있으니까 차는 세워두고 걸어오세요.”


차현준이 타운하우스 입구 쪽 한적한 길에 차를 세워두고 있었다. 차창을 열어 고개를 내민 차현준이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리며 손을 흔들었다. 꽤나 다정해 보이게.


우혁은 주차를 시켜놓고 성큼성큼 걸어 차현준 앞에 섰다. 차현준이 차를 빼더니 손으로 조수석을 가리켰다. 우혁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차창을 잡고 차현준을 노려보았다.


“너 지금 뭘 하자는 거니?”

“타이밍을 잡은 거지요.”

“타이밍?”

“제가 기다리는 걸 잘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래서 은근과 끈기로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빠방 때가 왔음을 느꼈습니다.”

“무슨 때?”

“궁금하시면 타세요. 그렇게 서서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카페에서 기다린다더니.”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저는 상관없는데 선배님은 상관있을 것 같아 이렇게 몸소 선배님을 모시러 왔지요.”


차현준이 찰칵 소리가 나게 락을 풀어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하지만 우혁은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고 망설였다.


“겁나세요?”


차현준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겁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호락호락하게 차현준에게 놀아나고 싶지도 않았다.


“내 차로 가자.”

“하아, 기선제압하시겠다. 핸들을 누가 쥐느냐의 문제로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그런 건 전혀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선배님이 굳이 운전을 하시겠다면 그러지요. 뭐.”


차현준이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트레이닝복 조거 팬츠에 민소매 셔츠를 입은 차현준이 해맑은 표정으로 우혁의 차에 올라탔다. 우혁은 입을 꽉 다문 채 차를 몰아 여의도 유람선 선착장이 보이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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