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8.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by 은예진

“와우, 여기 좋은데요. 우리 데이트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좋은 곳으로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우혁은 입을 꽉 다문 채로 전방을 응시했다. 마침 반짝이는 조명을 단 한강 유람선이 선착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유람선에서 들리는 흥겨운 음악 소리와 왁자지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차현준은 어둑해진 일몰의 시간을 장식한 화려한 불빛과 한강의 짙은 물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분위기 장난 아니네. 선배님 많이 와 본 모양입니다.”


우혁은 여전히 말이 없다. 차현준은 혼자 떠드는 게 심심한지 입맛을 다시더니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선배님이 그렇게 감춘다고 감췄는데 아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선배님이 어떻게 우명진과 계약을 해지하게 됐는지. 은서아 아버지가 선배님 인생을 어떻게 구원했는지.”


차현준은 구원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팔을 벌리며 턱을 치켜들고 성인(聖人) 흉내를 냈다.


“계속해라.”

“계속할 게 뭐 있겠습니까. 이거 보시면 게임 아웃인데.”


차현준이 히죽 웃으며 태블릿을 앞에 세워놓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거기 십여 년 전 어린 우혁이 있었다.


우혁이 목에 붉은 넥타이만 맨 채 술을 따르고 이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여자가 일어서더니 우혁의 목에 걸린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우혁은 커다란 개처럼 넥타이를 잡힌 채 여자 앞으로 끌려 나갔다.


“꺼라.”


우혁은 지표면을 뚫고 맨틀까지 내려갈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보세요. 벌써 이러시면 안 되지요. 조금 있으면 훨씬 재미있는 장면이 나올 거예요.”

“네 의도 충분히 알았으니까 꺼라.”

“아니 그러니까…….”


순간 우혁이 차현준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어찌나 바싹 움켜쥐었는지 차현준의 얼굴에 빨갛게 피가 몰렸다.


“헉. 흑. 윽.”


멱살을 잡은 우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대로 목을 힘껏 졸라버리고 싶었다. 차마 죽일 수 없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순간 목이 자유로워진 차현준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 얼굴에 손만 대봐. 얼굴에 손가락 하나라도 닿으면 이 동영상 지금 당장 내 에스엔에스에 올린다. 알지? 나, 구독자 수만 백만이 넘는 거.”


움켜쥔 주먹이 움찔거렸지만 끝내 차현준을 때리지 못하고 떨어트렸다. 우혁이 주먹을 내려놓자 차현준이 목을 돌리며 빈정거렸다.


“엎드려 빌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주먹을 들어? 지금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나 보지.”


더는 차현준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진 우혁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유월의 저녁 바람이 제법 시원하게 불어왔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숨을 들이쉬자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우명진은 걸핏하면 동영상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실제로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 동영상을 십 년도 더 지나서 차현준의 태블릿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슬그머니 따라 나온 차현준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 대 드릴까?”

“필요 없다.”


차현준은 피식 웃으며 혼자 연거푸 담배를 두 개비 피웠다. 우혁은 그 담배 냄새가 싫어서 옆으로 물러섰다.


“원하는 게 뭐니?”

“뭘 거 같아요? 한번 맞춰보세요.”

“너랑 말장난할 생각 없다.”

“성격 되게 급하시네. 좋아요. 조건은 하나. 나랑 같이 놀아요.”

“뭐라고?”


우혁은 차현준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해 눈을 깜빡였다.


“놀자고요. 단톡방도 만들고 같이 노는 겁니다.”


우혁은 그제야 차현준이 원하는 게 뭔지 이해하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웃었다.


“애들 불러서 같이 놀고 술도 마시고, 단체로 하기도 하고 그 사진 단톡방에 같이 올리고 뭐 이렇게 우리끼리 친하게 지내자 이거지요.”

“너 지금 나를 너랑 똑같이 만들어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겠다 이거니?”

“딩동댕!”

“동영상이 있는데 그 동영상만으로도 충분히 협박할 수 있는데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는 거니?”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당신이 나랑 똑같이 노는 걸 보고 싶다고나 해야 할까. 더군다나 이제 갓 결혼한 강우혁이 그렇게 노는 걸 생각하면 내가 완전 짜릿해.”

“미친 새끼.”


강우혁은 차에 올라타 문을 감가 버렸다. 차창을 열어 차현준의 가방과 태블릿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꺼져버려 이 새끼야!”


우혁은 차현준이 입을 열기 전에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가속력이 좋은 차는 짧은 시간에 엄청난 속도를 올리며 앞으로 나갔다. 이가 딱딱 부딪치게 부들부들 떨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차현준이 얼마나 많은 양의 동영상을 가지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십 대 초반 시절 우명진이 시키는 대로 술자리를 다니던 우혁은 안 해본 게 없었다. 여자들이 하라는 건 뭐든지 했다. 거절하다 땅에 묻히는 일까지 당해봤다.


얼마나 세게 입술을 깨물었는지 찝찌름하고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우혁의 눈앞에 자신의 삶이 산산조각 나는 모습이 홀로그램처럼 펼쳐졌다. 가끔 증권가 지라시에 강우혁이 호스트 출신이라는 말이 나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팬들이 들고 일어서서 막아주었다. 우혁은 그런 팬들에게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숨을 몰아쉬었다.


서아는? 동영상 속에 그가 하는 끔찍한 행위들을 본 서아는? 우혁은 그대로 차를 몰고 한강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지금 우혁이 해야 할 일은 민석을 만나는 것이다. 민석을 만나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민석에게 동영상 이야기를 하느니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싶을 지경이었다.

keyword
이전 07화97. 타이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