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산길을 내달렸다. 최근 일 년 동안 방문하지 않았던 별장에서는 오래도록 환기하지 않아 묵은 공기 냄새가 났다. 가평에 있는 별장은 민석도 알지 못하는 곳이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다. 오래 별러서 별장을 구입했지만 막상 로망을 실현하자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처음 일이 년 동안만 자주 가고 이후에는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서아를 만나고 나서는 아예 별장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별장은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었고 우혁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별장의 의미가 희미해졌다. 오늘은 그 별장이 필요했다.
업체에 맡겨 놓아서 기본 관리는 되고 있었다. 매달 청소를 하고 풀을 깎고 냉난방기가 고장 나지 않게 보수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아무리 관리를 해도 죽은 집이었다. 우혁은 캄캄한 거실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드러누웠다.
오늘은 소파가 끈적거릴 만큼 습기가 많은 날이다. 서아가 밤이 되면 전국적으로 비가 올 거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갑자기 어두운 창문 밖으로 번쩍하고 불빛이 스쳤다. 창 쪽을 보고 누워 있던 우혁이 몸을 돌려 소파에 얼굴을 묻었다.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리고 하늘이 쪼개지는 듯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세찬 비가 쏟아졌다. 울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우혁이 문을 열어젖히고 마당으로 나섰다. 발을 내딛자 질퍽한 잔디밭에서 물이 올라와 신발을 적셨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목을 타고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
빗속에서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다. 목이 터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냉정해지고 싶어도 냉정해지지 않았다. 온몸이 흥건하게 젖은 채로 문도 닫지 않고 들어가 소파에 널브러졌다. 그 상태로 어떻게 잠이 든 건지 모르겠지만 눈을 떴을 때는 따가운 햇살이 우혁의 눈을 찔렀다.
어젯밤의 요란했던 날씨는 꿈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어제 만난 차현준도 그가 봤던 동영상도 모두 꿈일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목이 부어서 말도 나오지 않고 얼굴에서 열이 확확 났다.
이마를 만져보자 뜨끈했다. 몸이 망가져도 제대로 망가진 모양이었다.
열두 시를 넘기자 참을 수 없어진 서아가 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현준의 전화를 받고 나간 우혁 오빠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어요. 전화기는 꺼져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자려고 누웠던 민석이 놀라서 도로 옷을 입고 달려왔다. 서아가 바싹 마른 입술로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문을 열어 주었다.
“다시 한번 정확히 설명해 주세요.”
민석이 들어오자마자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서아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서아는 우혁과 같이 있을 때 차현준의 전화가 왔고 운동실로 들어간 그가 곧 나갔다는 말밖에 해줄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답답했다.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물어봤어야 했다. 남편이 평범하지 않은 인물을 만나러 가는데 어떻게 이렇게 무신경했는지 한심했다.
“별일 없을 겁니다. 그냥 좀 화가 나고 답답한 모양이에요.”
민석이 우혁의 단골 술집이나 가끔 술을 마시는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지만 하나같이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두 시가 넘자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요란하게 쳤다. 비가 거세게 쏟아지는 밖을 내다보고 있던 서아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민석은 서아를 끌어다 소파에 앉히고 주방을 뒤져 캐머마일 차를 타왔다.
“서아 씨가 전에 그랬지요? 이게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고요. 우선 이거 마시고 숨을 좀 돌려야겠어요.”
민석이 찻잔을 들어 그녀에게 들려주는 순간 하늘을 찢어발기는 것만 같은 천둥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서아가 잔을 놓쳤다. 찻잔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면서 서아의 발에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놀란 서아가 비명을 질렀고 민석은 재빨리 그녀의 발을 잡고 살폈다. 다행히도 물이 발보다는 러그 쪽으로 많이 쏟아져 크게 화상을 입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휴우. 다행이네요.”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요.”
서아는 바닥에 떨어진 찻잔을 수습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민석은 그런 서아의 손을 잡고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요.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해요.”
그제야 서아는 자신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사고만 칠 뿐이라는 생각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요?”
“우선 차현준이한테 연락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차현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가 돼서야 술에 취한 듯한 차현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어쩐 일로 저한테 전화를 다 주셨나요?”
차현준의 목소리 뒤로 쿵쿵거리는 빠른 비트의 음악소리가 들렸다.
“차현준 씨 만나러 나간 우혁이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네에? 누구라고요?”
“당신 만난다고 나간 강우혁 말입니다.”
“아, 그 치사한 선배님. 선배님은 저를 한강 유람선 선착장에다 내려놓고 혼자 가버리셨지 뭐예요. 거기서 매니저 불러서 나오느라고 한참을 기다렸어요.”
“지금 좀 만났으면 좋겠는데 어디 있는 겁니까?”
“네?”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고요.”
그때 차현준의 옆에서 누군가 그만 통화하라며 핸드폰을 뺏는 소리가 났다. 깔깔대는 여자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곧 끊어졌다. 민석이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새끼가 정말.”
민석이 씩씩대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격적으로 우혁을 찾기로 마음먹었는지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뒷골목 라인에 죄다 전화를 돌렸다. 그렇게 한참을 전화기를 돌리며 씨름을 했지만 서울 어디서도 우혁을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