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더는 말이 필요 없을 것만 같았다. 우혁에게 무슨 일이 어떻게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차현준을 만나고 온 날부터 예전에 그 사람이 아니었다. 서아가 사랑하던 우혁 오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 이런다고 하더라도 그 사연을 공유할 마음이 없다는 건 결국 그만큼 서아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것이다. 우혁의 마음은 거기까지였다. 십억을 쓰는 것도 서아를 구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비난받지 않기 위해 쓰는 거다.
“이혼 절차는 장 대표님하고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강우혁 씨하고는 뵐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여기서 인사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서아가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서아가 방으로 들어가자 닫힌 방문을 보는 우혁의 눈이 흐릿해졌다.
“우혁아!”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나로서는 이게 최선이라고 선택한 거다.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비난받아도 어쩔 수 없다. 죽으면 죽었지 서아랑 같이 그 동영상 문제를 헤쳐 나갈 자신 없다.”
“실망이다. 강우혁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물이라니. 서아 씨에 대한 마음이 고작 이 정도였다니.”
우혁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너한테 여러 가지로 미안하다.”
“시끄러워. 나도 너랑 헤어지고 싶지만 지금 당장 그럴 수가 없어서 그냥 나가야겠다. 꼴도 보고 싫어.”
우혁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히죽 웃었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도리어 마음이 편하네. 위로하려고 들면 어리광을 부렸을 텐데 화를 내니 아무 소리도 못하겠다.”
“너 이러는 꼴 우습게 만들기 위해서도 내가 차현준이 절대 그 동영상 못 풀게 할 거다. 그때 후회해도 소용없을 거야.”
민석의 단호한 말에 우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가서 사과하고 붙들어. 지금 네가 왜 그러는지 솔직하게 말해.”
“싫어. 서아한테 그런 찌질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어처구니가 없네. 찌질 한 거는 지금 네가 이러고 있는 게 찌질 한 거다. 이 바보 같은 놈아.”
민석이 씩씩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고윤희가 앞으로 절대 서아 이름 팔지 못하게 단단히 교육해라. 당신 때문에 서아 이혼 당했다고 알리고 서아 입장문 발표해. 서아 구박한 새엄마라는 사실 꼭 밝혀서 앞으로 어떤 채권자도 서아한테 돈 달라는 소리 못하게 만들어.”
“고양이 쥐 생각하지 마라.”
민석이 냉랭한 목소리로 쏘아붙이고 집을 나섰다. 민석이 현관문을 나서자 칠월이가 반갑다는 듯 발목에 감겼다. 민석은 서아가 앉아 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칠월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색 바지 위에 칠월이를 올려놓자 치즈 냥이인 칠월이의 누런색 털이 바지에 묻어났다.
“애초부터 잘못한 거였어. 저런 놈이 무슨 사랑을 한다고. 사랑할 자격조차 없는 놈이 천사 같은 서아 씨 날개를 꺾어놓았으니. 빌어먹을. 네 주인 이제 어쩌냐? 어떻게 하냐?”
서아는 집안 대청소를 시작했다. 우혁이 방문을 닫아버린 두 달간 할 일이라고는 집안일밖에 없어 구석구석 깨끗하게 관리를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손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주방에서 그녀가 디저트를 만들던 흔적을 말끔히 치웠다. 남은 재료는 모두 구움 과자와 타르트를 만들어 소진시켰다. 우혁이 서아에게 줬던 아빠 책 ‘시청자를 울리고 웃기는 드라마’는 도로 우혁의 책장에 꽂았다.
채영에게 향긋한 복숭아를 얹은 타르트를 만들어 가지고 가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녀는 말도 안 된다며 우혁을 만나러 가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 인간이 미친 거 아니야? 이제 겨우 일 년도 안 돼서 이혼이라고? 그것도 네 새엄마가 진 빚 때문에?”
“언니, 진정해요. 그냥 빚 수준이 아니에요. 우혁 오빠를 팔아서 작정을 하고 사기를 치고 다녔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지. 저 인간 생각보다 쓰레기네.”
채영의 입에서 쓰레기라는 말이 나오자 서아의 가슴이 철렁했다. 채영에게 우혁 오빠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화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편들어 준다고 하는 말에 화를 낼 수는 없으니 참아야 하는 줄 알면서도 우혁을 쓰레기라고 하는 게 듣기 싫었다.
“이혼 말 먼저 꺼낸 건 오빠가 아니고 저예요.”
“오죽했으면 네가 이혼 말을 꺼냈겠어. 그건 네가 꺼낸 게 아니고 강우혁이 꺼내게 만든 거지.”
“마음을 닫아버린 오빠한테 내가 지친 걸 수도 있어요.”
“바보같이 강우혁 편들어 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구나? 그래서 너는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정말 이혼할 거야?”
“저한테는 선택권이 없는 것 같아요.”
“세상에 이를 어쩌니.”
채영이 서아를 와락 껴안고 등을 두드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채영이 갑자기 서아를 품에서 떼어놓고 눈을 반짝였다.
“너 오빠 집 나와도 갈 데 없지?”
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채영이 손가락을 튕겼다.
“너 우리 집에 취직해라.”
“네?”
서아는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혁 오빠가 너를 자기네 집 가사도우미로 데려왔잖아. 거기 나와도 당장 갈 데도 없는데 당분간 마음 추스를 때까지 우리 집에서 일해.”
서아는 채영의 마음 씀에 당황해서 대답을 쉽게 하지 못했다. 우혁의 집에서 하루라도 빨리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갈 곳이 없어 망설이고 있었다. 그동안 우혁에게서 받은 돈은 모두 돌려주고 나갈 생각이었다.
돈도 없고 가족도 없는 서아가 갈 수 있는 곳이 없어 매일 취업사이트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 서아에게 숙식을 제공하겠다며 나서는 채영의 제안에 마음이 울컥했다. 뜨겁게 화내고 뜨겁게 사랑하는 채영의 열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이었다.
“우혁 오빠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서 그 사람을 미워할 수가 없어요.”
서아가 쭈뼛거리며 말하자 채영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무슨 소리야, 그 엑스 같은 강우혁 욕 실컷 하고 미워해야지. 너 그런 인간한테 미련 갖지 마. 너 같이 예쁘고 착한 얘는 강우혁보다 백배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해!”
서아는 그동안 꾹꾹 눌러 참고 있던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손등으로 닦으며 코를 훌쩍거렸다. 그래 미워하자. 미워해야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다면 미워하자.
“언니, 그런데 칠월이 데려와도 돼요?”
서아가 저를 따라서 채영의 집까지 같이 와 마당에서 식빵을 굽고 있는 칠월이를 내다보며 말했다.
“쟤 그러잖아도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 올 때마다 내가 치즈스틱을 줘서 그런가 봐.”
“지금은 어쩔 수 없어서 언니 도움을 거절하지 못하겠어요. 그런데 오래는 있지 않을게요. 고마워요 언니.”
채영은 다시 한번 서아를 껴안으며 대답했다.
“그래 가사도우미는 오래 하지 말고 빨리 네 일을 해야지. 네가 예뻐서라기보다는 저 강우혁이 미워서 하는 일이니까 부담 갖지 마.”
채영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아를 진정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