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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거물에게 거는 희망

by 은예진

“그동안 어디서 지냈어요?”


민석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서아에게 물었다.


“…….”

“칠월이는 채영이가 맡고 있는 거지요? 우혁이네 집에도 자주 놀러 오더라고요.”

“칠월이가 집엘 간다고요?”


민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칠월이 목에 걸린 방울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빨간색 스카프 천으로 된 목줄에 진주 장식이 달린 방울을 걸고 나타난 칠월이는 자기가 명품 목걸이라도 한 듯 뻐기는 표정을 지었다.

채영이와 서아가 칠월이 표정 때문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도대체 누가 칠월이 목에 방울을 달아줬을까 했더니 우혁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저를 왜 보자고 하셨어요?”

“섭섭합니다. 우혁이랑 그렇게 되었다고 소속사 사장인 저한테까지 이렇게 매몰찬 목소리로 이유를 물어야 하는 건가요?”


민석의 말에 서아가 민망한지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요. 저한테 장 대표님은 우혁 오빠랑 같이 묶여 있는 사람이라 저도 모르게 쌀쌀맞은 말이 나왔네요.”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민석이 정산서 내역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동안 광고 찍은 거 하고 달콤 출연료 미 지급분이 나왔어요. 이거 드리고 사인`받아야 해서 나오시라고 했습니다.”


서아는 민석이 내민 정산 내역을 확인하고 자기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나 많이…….”

“이 돈은 우혁이한테 빚 갚는다고 하지 말고 파리로 떠나요. 지금 이 돈을 줘버리면 서아 씨는 앞으로 계속 똑같은 삶을 살고 우혁이한테 빚을 갚을 수 없게 돼요. 하지만 이 돈을 가지고 르 꼬르동 블루 가서 공부를 시작하면 달라질 수 있어요.”


서아는 침을 꼴깍 삼키고 정산서를 움켜쥔 채 민석을 바라보았다.


“모르겠어요. 생각지도 못하게 큰돈이 생기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요. 이 돈도 결국 우혁 씨 덕분에 번 돈이니 우혁 씨한테 돌려줘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줄 수 있는 돈은 고작 오천만 원이지만 서아 씨가 그 돈을 바탕으로 성공하면 더 큰돈을 갚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본인을 위해 써야 합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서아가 결국 정산서에 사인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 대표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떠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다행입니다. 정말 잘 생각했어요.”


민석이 너무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서아를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서아가 채영의 집에서 지내는 건 모르는 일로 해야 해서 카페에서 헤어졌다.


같은 단지에 살면서 모르는 척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이웃에 누가 사는지 제대로 모르는 우혁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아 씨가 돈 받고 파리로 떠나기로 했어.”

-조금 더 많이 줄 걸 그랬지?

“그 돈도 많아서 망설였어. 너무 많이 주면 의심을 사니까 빠듯하게 모자란 듯 주는 게 잘한 거야.”

-그래도 학비가 삼천만 원에 프랑스어 수업비가 또 …….

“야, 인마, 그렇게 걱정되면 지금이라도 어쩔 수 없었던 네 사정을 이야기해.”

-싫어.

“그럼 신경도 끊어.”


민석은 신경도 끊으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어버렸다. 우혁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차현준이 그 미친놈한테 화가 났다. 이제 차현준은 더 못 기다린다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이달 30일 클럽 몬드리안에서 모이는 술자리에 강우혁이 참석하지 않으면 동영상이 배포될 거라고 했다.


강우혁의 호스트 동영상을 가지고 있는 차현준은 이번에는 일탈 동영상을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30일까지 해결하지 못하면 동영상이 풀리는 것은 각오해야 한다. 우혁은 그전에 서아가 한국을 떠나기 바라고 있다. 르 꼬르동 블루의 제과 디플로마 (Pastry Diploma) 새 학기 시작이 25일에 있으니 서아가 마음만 먹으면 이 달에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민석은 회사로 들어가지 않고 다음 약속 상대를 만나기 위해 워싱턴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어렵게 약속을 잡았다. 그녀와 직접 통화를 하기 위해 거친 단계만 4단계였다. 민석이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이란 인맥은 모두 동원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만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 살짝 내비치자 약속 장소가 일반적인 카페가 아니라 호텔로 잡혔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한 민석은 잠시 로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어갔다.


지금까지 세 명을 만났고 모두 거절당했다. 이제 와서 십 년 전 일을 꺼내는 민석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코웃음을 쳤다. 다시 한번 이런 용무로 나타나면 협박으로 신고를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오늘 약속한 사람은 그동안 민석이 접촉을 시도한 여자들과는 레벨이 다르다. 이런 거물이 만나주기로 했으니 희망을 품어도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만약 그녀가 우혁을 구해준다면 서아를 파리로 보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민석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약속 시간을 삼십 분 앞두고 문자가 들어왔다.


<상무님 도착해 계시니 올라오십시오.>


문자를 확인한 민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올라오라고 시키는 것이다. 평일 오후 호텔 로비 카페에는 평범해 보이는 직장인 서넛과 외국인들만 보일 뿐 그를 감시할만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 스위트룸이 있는 17층에서 내렸다. 카펫이 깔린 복도에서 짙은 샌달우드 향이 풍긴다. 양쪽으로 룸이 있는 어둑한 복도를 걸으며 민석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뭔가 현실과 괴리된 곳에 사는 여왕을 만나러 가는 느낌이었다.


1725호 앞에 선 민석이 숨을 몰아쉬고 더블 재킷의 단추를 채웠다. 흠흠 거리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벨을 눌렀다. 안에서는 대답 없이 문이 열리고 서른 안팎으로 보이는 여자가 고개를 숙였다.


“장민석 대표님 어서 오세요.”


타이트한 에이치라인 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는 비서인 모양이었다. 여자를 따라 거실에 앉자 묻지도 않고 차를 내왔다. 민석이 평소에 자주 마시는 녹차인 삼다연 ‘후’였다. 민석은 그 녹차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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