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K401 측에서는 은서아 입장문을 통해 고윤희가 진 빚은 강우혁과 은서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음을 밝혔다.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이복동생을 봐서 이번 한 번 빚을 갚아주었다는 말과 함께 앞으로 고윤희가 또다시 빚을 진다면 두 사람 모두 갚아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한마디로 앞으로 고윤희에게 돈을 빌려준다면 절대 받을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서아의 입장문이 나가자마자 고윤희와 제인이 트렁크 두 개를 들고 한남 타운 하우스로 들이닥쳤다.
두 사람에 대한 기사를 본 경비가 난처한 목소리로 우혁에게 고윤희가 찾아왔음을 알렸다. 서아가 떠난 빈집에 멍청하니 앉아 허공만 보고 있던 우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하면 양심이 저렇게 없을 수 있는 건지 신기한 모녀였다.
우혁은 수염도 깎지 않은 얼굴에 모자를 뒤집어쓴 채 집을 나섰다. 차를 몰고 나선 우혁은 곧바로 타운 하우스 출입구로 향하지 않고 채영의 집 쪽으로 돌아나갔다.
멈추고 싶었다. 멈추면 그녀가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릴지 모르는 일이라 그냥 지나쳐야 한다. 마음은 지나쳐야 한다고 되새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브레이크를 밟았다. 서아와 이혼을 결정하고 제일 먼저 채영을 만났다.
"뭐야? 어쩐 일로 오빠가 나를 보자고 해? 몰골은 또 그게 뭐야? 요즘 왜 그래?"
채영은 우혁을 보자마자 한꺼번에 질문을 쏟아냈다. 우혁은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자신이 그녀를 찾아온 용건을 먼저 꺼냈다.
'나 이혼할 거야."
놀란 채영은 이게 다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질렀지만 우혁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우리 서아 좀 부탁할게. 걔 갈 곳이 없어. 그동안 벌어놓은 돈도 모두 나한테 도로 보냈어. 한마디로 빈털터리로 나가겠다는 건데 그런 서아를 네가 당분간이라도 좀 보살펴주라. 서아한테 나가는 돈은 내가 줄게."
팔짱을 끼고 우혁을 빤히 바라보던 채영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열부 나셨네. 그러니까 이혼은 할 수 없이 하는 거고 나는 아직도 서아를 사랑해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참는 거냐?"
우혁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미안하다.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사연이 있다."
"내 마음도 이렇게 불쾌한데 서아는 어떨까. 오빠 지금 나한테 이런 부탁하며 속으로 그래도 나는 서아 걱정을 하고, 서아를 챙겨 뭐 이런 자기만족 느끼는 거지?"
핵심을 찔린 우혁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오빠를 봐서는 코웃음 치며 내쫓고 싶지만 나도 서아가 갈 곳 없이 떠도는 꼴은 볼 수 없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붙잡아 볼게."
"고맙다. 정말 고맙다."
채영은 우혁의 고맙다는 말에 닥치라는 소리를 연거푸 했다.
"그리고 비용 따위 다시 거론하면 그때는 아무리 마음 아파도 서아 거들떠도 안 볼 거니까 그리 알아."
채영의 말에 우혁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서아가 아니었으면 채영이 이렇게 괜찮은 아이라는 걸 모르고 지날 뻔했다.
생각에 잠겨 채영의 집을 바라보고 있는 우혁의 앞에 칠월이가 달려왔다. 우혁은 조심스럽게 차 문을 열고 칠월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칠월이 너 우리 서아 잘 지켜주고 있냐?”
우혁의 말에 칠월이가 대답하듯 야옹거렸다.
“짜식, 너라도 있어서 내 마음이 한결 가볍다.”
우혁은 계속 칠월이랑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집 안에서 칠월이를 부르는 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혁은 재빨리 칠월이를 밀쳐내고 차 문을 닫았다. 서둘러 차를 몰고 경비실로 향했다. 차를 안쪽에 세워두고 걸어 나가자 경비실 안에 쪼그리고 있던 고윤희가 강 서방을 외치며 일어섰다.
구치소까지 다녀온 고윤희의 외모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염색을 하지 않아 반은 검고 반은 하얀 머리 하며 화장기 없는 얼굴과 차림새가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옆에 있다 덩달아 일어난 제인은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을 경비실 밖으로 데리고 나온 우혁은 어디 데리고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길거리에 세워두었다.
“강 서방 집에 가서 이야기 좀 하면 안 될까? 우리가 너무 피곤해서 말이야.”
“안됩니다.”
“서아를 봐서라도 이러는 거 아니지.”
“서아를 봐서 구치소에 있는 걸 꺼내줬고, 서아를 봐서 십억 빚을 갚아줬습니다. 얼마나 더 서아를 팔아야 하는 겁니까?”
“알아, 알기는 하는데 우리가 갈 곳이 없어요. 집도 넘어가고 차도 뺏기고 ……. 지금 의지할 곳은 강 서방밖에 없어서 말이야.”
고윤희는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기 위해 입을 합죽이 모양으로 만들며 목을 뒤로 뺐다. 우혁은 그런 고윤희의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저 이제 당신한테 강 서방 아닙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준 당신 때문에 서아가 이혼당했습니다. 알겠어요? 서아도 당신처럼 한 푼도 챙기지 못하고 쫓겨났다 이 말입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서아가 이혼을 해? 나 때문에? 왜?”
“왜라고요?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당신! 다시 이곳에 나타나면 무조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꺼지세요. 서아는 이제 빈털터리니 걔 찾아도 소용없을 겁니다.”
“내가 그걸 믿으라고? 에이 돈 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 나 때문에 이혼이라니.”
고윤희가 손사래를 치며 절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우혁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고윤희 얼굴에 바싹 다가섰다.
“그 철면피를 한번 만져보고 싶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살 수 있는지. 당신이 믿건 안 믿건 상관없지만 내일이면 이혼 기사 뜰 거야. 궁금하면 내일 기사를 정독하라고.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서아는 당신 때문에 이혼당한 거야. 정확히 알고 있어.”
옆에서 제인이 입을 틀어막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우혁은 그런 제인을 보며 저건 또 뭐냐는 표정을 지었다. 볼 때마다 마른 제인은 이제 거의 거식증 환자 수준으로 보였다.
“내가 그 말을 믿을 줄 알아? 그냥 도와주기 싫으면 도와주기 싫다고 해!”
고윤희가 이를 바드득 갈며 바닥에 주저앉은 제인을 부축했다. 우혁은 그런 모녀를 바퀴벌레 보듯 노려보고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