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차 심부름을 할 뿐 스위트룸의 거실은 조용했다. 은은한 차향이 퍼지자 산사에 와 있는 느낌이 들 만큼 고즈넉하게 느껴졌다. 약속 시간이 되자 룸의 문이 열리고 민석과 약속한 삼일 전자 상무 유영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영하는 가볍게 올려 묶은 머리에 편안한 와이드 팬츠와 민소매 셔츠를 입고 긴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뒤따라 나온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둘은 검은 양복에 인이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유영하의 모습을 본 민석은 용수철 인형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유영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파에 털썩 앉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안에서 보고는 다 받았어요. 동영상은 직접 확인한 건가요?”
“제가 한건 아니고 강우혁 배우가 했습니다. 그 동영상에 상무님 모습이 정확히 찍혔다고 합니다.”
“하, 참 그거 십 년 전에 처리한 건데 이제야 카피본이 나왔단 말이야? 우명진 그 인간을 묻어 버렸어야 하는 건데.”
“정확히는 우명진이 아닙니다.”
유영하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럼 누구?”
“혹시 차현준이라고 아십니까? 차현준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동영상을 입수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차현준? 그게 누구야?”
유영하가 손짓하자 비서가 재빨리 태블릿에 차현준을 띄워 내밀었다.
“잘 생겼네. 이렇게 잘 생긴 애가 왜 동영상을 가지고 강우혁을 협박해?”
유영하의 태도와 목소리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느껴졌다. 마치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 거 아니냐고 말했다던 마리 앙뜨와네뜨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다.
“차현준이 미성년자 여배우를 상대로 몹쓸 짓을 하는 걸 강우혁이 막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생각됩니다.”
“아, 뭔지 알겠다. 대략 그림 나온다. 그러니까 이대로 놔두면 강우혁도 나도 같이 골치 아파지니 막아 달라 이 말?”
“네, 그렇습니다.”
“차현준도 생각이 있는 인간이면 나는 블라인드 처리해서 풀지 않을까?”
“요즘 기술 좋아서 사람들이 호기심에 복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흠. 그럴 수도 있겠네.”
유영하는 우혁에게 접대를 받던 당시에는 유부녀였지만 십 년 사이 이혼하고 아이 둘을 키우며 혼자 살고 있다. 그런 탓인지 동영상에 대해 그다지 긴장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도와주십시오. 상무님.”
민석이 무릎에 올려놓은 손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조아렸다. 차현준의 사진을 올렸다 내렸다 손장난 하던 유영하가 민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혁이는 잘 지내고 있어요?”
“차현준한테서 협박이 들어온 날 이후로 두문불출 한지 오래됐습니다. 지난번 드라마가 잘 돼서 광고도 제법 들어왔었는데 모두 날리고 꼼짝 않고 있습니다.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혁이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휴.”
유영하는 한숨을 쉬더니 손짓으로 뒤에 지키고 서 있던 경호원을 불렀다.
“당신 선에서 할 일이 아닌 거 같으니까 박 부장 오라고 해. 그냥 놔두면 안 될 것 같아.”
“알겠습니다.”
경호원이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이고 호텔방을 빠져나갔다.
“우혁이는 기억하기도 싫겠지만 나는 사실 그때 걔 많이 좋아했어요. 그래서 더 자주 불렀지.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는 이야기였는데 이제라도 우혁이를 도와줄 수 있다니 기쁜 마음으로 해줄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민석은 그 자리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이마를 바닥에 조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현준이 어떻게 해줄까? 갖다 묻어 버릴까? 아니면 다시는 연예계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할까?”
“지금까지 그 자식이 했던 악행이 세상에 알려지고 정당한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으래? 잘하면 차현준이 주변에 한바탕 폭탄이 터지겠네? 혹시 우리 회사랑 연관된 게 있나 살펴보고 있으면 안 되고 없으면 원하는 대로 해줄게.”
민석은 계속해서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갈 테니 박 부장 오면 둘이 상의해서 일 진행해요. 그럼 이만.”
유영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려다 말고 생각난 듯 뒤돌아섰다.
“그런데 이름이 뭐라고 했지?”
“JK401 대표 장민석이라고 합니다.”
“민석 씨, 여자 친구 있어?”
“네?”
놀란 민석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 민석을 본 유영하가 깔깔거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 놀라기는. 내가 잡아먹냐? 나 아니거든. 마음에 들어서 얘 하고 소개팅 시켜줄까 했거든.”
유영하가 옆에 서 있는 비서를 끌어오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됐어. 자기 같은 쫄보한테 얘 소개 안 시켜준다.”
민석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