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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신뢰가 없는 관계

by 은예진

수업을 끝내고 들어온 서아는 방에 들오자마자 옷도 벗지 못하고 침대에 엎어졌다. 잠시만 그렇게 있으려고 했지만 어느새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서아, 일어나. 내가 오믈렛 했어. 같이 저녁 먹자.”


누군가 그녀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혼자 힘으로 움직이지 못하던 서아가 누군가의 도움에 눈을 떴다.


“첸?”


어둑한 방에 얌전하게 생긴 동양 남자가 침대에 걸터앉아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첸. 도저히 혼자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었는데 네 덕분에 눈을 떴어.”


몸을 일으킨 서아가 기지개를 켰다. 첸은 그런 서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가자. 저녁 먹고 리포트 써야 하잖아.”

“아, 싫다. 싫어. 리포트 쓸 생각을 하니까 머리에 쥐가 난다.”


첸이 킥킥 웃으며 방을 나갔다. 서아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첸을 따라 나가 식탁에 앉았다. 첸이 차려놓은 식탁에는 오믈렛과 요구르트, 바게트와 샐러드 그리고 하몽까지 있었다.


“진수성찬이네.”

“진수성찬?”

“응, 진수성찬!”

“와 그 말 되게 오랜만이다.”


첸은 중국계 프랑스인이지만 한국에서 오 년이나 살았던 경험이 있어서 한국말을 굉장히 잘한다. 서아가 처음 파리로 와서 게스트 하우스에 머무르며 일 년간 지낼 방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다 얻은 곳이 바로 첸이 운영하는 렌트 하우스였다.


샤틀레(chatelet) 역 근방에 있는 이곳은 치안이 좋고 가까운 곳에 신선한 해산물 가게와 빵 가게, 치즈 가게가 있었다.


한국말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한국인 세입자를 찾던 첸은 서아를 보자 단박에 입주를 허락했다. 한 달에 우리 돈으로 백만 원 정도로 계약했는데 가격이 저렴한 대신 서아가 건물 청소를 해주기로 했다.


방이 세 개라 하나는 첸이 쓰고 두 개는 렌털을 하고 있는데 최근에 방이 비어서 두 사람만 살고 있다. 지난 몇 개월간 첸이 식사에 서아를 초대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첸이 몹시 심하게 아파 고생을 했었다. 그때 서아가 첸을 간호해 주고 신경을 써줬더니 첸의 태도가 달라졌다.


서아는 첸이 저녁을 챙겨주면 부담 없이 얻어먹고 기회가 있을 때 또 그녀가 차려서 첸을 대접한다. 같은 집에 살면서 그런 일을 불편하게 여기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번에 서아랑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내렸잖아. 그 짧은 시간에 내 한국 친구들이 서아를 알아보고 댓글을 달았어.”


서아가 바게트 사이에 하몽과 샐러드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첸이 인스타그램에 자신과 같이 찍은 사진을 올려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 별생각 없이 허락했다.


허락하고 나서야 인터넷 세상은 국경 따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자신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니. 빠르기도 하다.


“맞아. 내가 한국에서 유명 배우의 아내였거든. 지금은 헤어졌지만.”

“그렇구나. 한국 친구들이 흥분해서 은서아가 틀림없다고 떠드는데 내가 모른 척했어. 잘했지?”

“응, 고마워.”


서아가 샌드위치를 한입 가득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아는 첸이 남자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서 이렇게 둘 만 지내는데도 불편한 느낌이 없다. 첸은 집주인이면서 파리에서 제일 먼저 사귄 친구였다. 첸이 조금이라도 남자로서 어필했다면 거리를 뒀겠지만 그는 선을 넘지 않고 서아와 관계를 잘 유지하며 지내고 있었다.


“이제 르 꼬르동 블루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여전히 힘든가 봐.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너무 지쳐 보이던데.”

“영어도 부족하고, 프랑스어도 부족하고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디저트 만들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서아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자 첸이 웃으며 와인 잔을 채워주었다.


“결국 발전하고 있다는 소리네. 쉽기만 하면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는 거잖아. 그런데 어려운 일은 그만큼 새로운 일을 하는 거니까 비싼 수업료 내며 공부하는 보람이 있는 거지.”

“와, 그렇구나.”


서아는 첸의 말에 손뼉을 치며 위로를 받았다. 서아의 생활을 아는 첸이 어서 들어가 리포트를 쓰라며 서아 등을 떠밀었다.


“밥을 얻어먹었으면 설거지는 내가 해야지.”


서아가 개수대로 향하자 첸이 손을 흔들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이건 내가 초대한 저녁 식사야. 나는 손님한테 일을 시키지 않아.”


서아가 배시시 웃으며 그런 첸의 목을 다시 한번 껴안고 그의 뺨에 자신의 뺨의 댔다.


“고마워 첸. 이 낯선 땅에서 첸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이 되지 않아.”


첸은 아빠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너를 우리 집에 들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한국말도 잊지 않고 외롭지도 않으니 말이야.”


서아는 손을 흔들고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르 꼬르동 블루의 제과 디플로마 과정은 소문대로 보통 엄격한 게 아니었다. 덕분에 한국에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가끔 파리의 길고양이를 볼 때마

다 칠월이가 생각난다. 칠월이는 채영의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채영은 종종 칠월이의 소식 이외에도 묻지 않은 우혁의 소식도 전해주고 있다. 듣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지만 채영은 그녀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무시하며 집행자 시즌 투도 시즌 원만큼이나 시청률이 나왔다며 우혁을 부러워했다.


리포트를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켠 서아는 칠월이에서 시작된 상념이 결국 우혁에게로 넘어갔음을 깨달았다.

민석은 강우혁이 그렇게 매몰차게 서아를 내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려주었다. 놀랍지도 않았다.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는 우혁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우혁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혁은 그녀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신뢰가 없는 관계는 어차피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서아는 도리질을 하며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개를 저으면서도 손가락은 제멋대로 집행자를 검색하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생각은 손가락을 이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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