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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저 사람이 왜 여기에

by 은예진

서아는 시간이 날 때마다 파리의 유명한 제과점을 방문하고 있다. 이번에는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이 추천해 준 알리그르(Aligre) 거리의 블레 쉬크레(Ble Sucre)를 찾아가는 길이다. 스타 파티시에들이 만드는 입이 벌어지게 비싼 디저트는 구경밖에 할 수 없다. 그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따름이었다.


친구들이 말하기를 블레 쉬크레 디저트는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입으로도 맛볼 수 있도록 합리적인 가격이라며 강력 추천해 주었다. 집과 학교만 다녔던 서아는 조심스럽게 지도를 봐가며 알리그르 거리를 찾아갔다.


바스티유 광장을 지나 알리그르 거리로 들어서자 소박하지만 예쁘장한 블레 쉬크레가 눈에 뜨였다.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 서두르던 서아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추었다.


블레 쉬크레 야외 테이블에 앉아 턱을 고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의 모습이 너무 낯이 익었다. 서아는 믿을 수가 없어 주먹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남자는 우혁이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서아는 멍청한 얼굴로 우혁을 바라보기만 할 뿐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혁은 아직도 턱을 고인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서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제 손을 내리고 허리를 곧추세운 채 빙그레 웃으며 서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그제야 서아는 오늘 아침에 채영에게 알리그르 거리의 블레 쉬크레를 갈 거라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놈의 톡이 문제다. 파리까지 와서 채영과 너무 많은 톡을 하고 있었다.

잠시 눈을 내리깔고 있던 서아가 숨을 몰아쉬고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결정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모르는 사람은 그냥 스쳐 지나가면 되는 거다.’


서아는 당당하게 걷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었다. 제 딴에는 당당함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걸음이었다.


서아가 가까이 오자 우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서아는 무시하고 블레 쉬크레 안으로 들어갔다. 서아가 그를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당황한 우혁이 들었던 손을 내리지도 못하고 굳은 채 서 있었다.


서아는 블레 쉬크레에서 제일 유명한 사과 반 개를 통째로 올린 타르트를 구경하며 그 대담함에 감탄했다. 질 좋은 버터를 사용하는 가게 안에서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가득했다.


서아가 사과 타르트와 페이스트리를 사자 따라 들어온 우혁도 그녀가 산 것과 똑같이 사서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서아는 우혁이 계산을 하는 사이 재빨리 블레 쉬크레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우혁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


“은서아!”


서아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우혁이 옆으로 바싹 대들며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이러지 말고 제발 나 좀 봐줘라.”


서아는 재빠르게 우혁의 손을 뿌리치고 그를 노려보았다.


“누구세요?”

“네 전남편.”


말문이 막힌 서아는 어이가 없어 ‘헉’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우혁의 대답에 화가 솟구쳤다.


“저는 이혼하면서 전남편 같은 사람 기억에서 삭제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알아보지 못하겠으니 비켜주세요.”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우혁이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아는 어이가 없어서 손에 들고 있던 타르트 봉지로 그의 얼굴을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타르트는 소중하니까 참아야 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저는 하나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보고 싶었다고 하는 건 폭력입니다. 비켜 주세요.”

“서아야, 제발.”


우혁의 얼굴이 절실해 보였다. 하지만 서아는 그게 본래의 얼굴인지 가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자전거를 탄 첸이 저만치서 서아를 알아보고 달려왔다.


“첸! 첸!”


서아가 반가운 목소리로 마구 손을 흔들며 첸을 불렀다. 첸은 자전거에서 뛰어내려 그녀를 붙들고 있는 우혁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서아는 그런 첸의 목을 감싸 안고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여기서 첸을 만나다니. 너무 반가워.”

“무슨 일?”

“나 태워줄 수 있지? 나랑 같이 들어가자.”


공포에 질린 듯한 서아의 태도에 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첸은 우혁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의심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서아가 키스를 퍼붓는 것을 보고 몹시 불쾌해진 우혁이 당장 첸의 목을 잡을 듯 노려보았다. 첸은 그런 우혁의 표정을 보고 흠칫하며 서둘러 자전거에 올랐다.


“빨리 가는 게 좋겠다. 이 남자 이상해.”


첸이 불어로 말하자 서아도 불어로 대답했다.


“맞아. 이상한 남자야. 빨리 가자.”


서아는 첸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그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첸은 출발하기 전에 자신의 허리를 감싸 쥔 서아의 손을 톡톡 치더니 힘껏 페달을 밟았다. 한참을 달려 우혁이 보이지 않을 만큼 오자 서아가 첸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서아야, 그 남자 네 전남편 맞지?”

“어떻게 알았어?”

“네 전 남편이 배우였다고 했잖아. 나도 한국에 있을 때 영화에서 봤던 기억이 있어.”

“그렇구나. 맞아. 강우혁.”

“멋있더라. 내가 그 남자 옆에 있으니까 너희 나라말로 오징어가 되는 것 같았어.”

“아니야, 첸 너도 충분히 멋있어.”

“흠, 별로 신빙성 없는 말이지만 고맙네.”

“내가 고맙지. 나를 그 사람한테서 구해주었으니.”

“구해줘? 아닌 것 같은데.”


서아는 말이 없었다. 첸은 더는 묻지 않고 서아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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