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프다면서요. 어서 먹어봐요. 여기 에스카르고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너 같으면 지금 달팽이가 목으로 넘어가겠니?”
“나는 우혁 씨한테서 쫓겨나고도 잘 먹고 잘 살아서 여기까지 왔어요. 이혼당하고도 멀쩡히 사는데 이혼한 전처한테 남자가 생겼다고 그렇게 상심하는 거 되게 웃겨요.”
서아는 에스카르고를 가져다 자기 접시에 올려놓고 소스를 듬뿍 발라 빵과 같이 먹었다.
“나는 에스카르고보다는 우리나라 전복요리가 더 맛있는 것 같아요. 소라랑 맛이 비슷하지요?”
우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에스카르고를 먹고 있는 서아가 못마땅한 듯 노려보더니 웨이터를 불러 와인을 시
켰다. 웨이터가 알아듣지도 못할 불어를 떠들며 손가락으로 와인 리스트를 꼽자 우혁은 대충 아무거나 달라며 짜증을 부렸다.
와인이 나오자 우혁은 잔을 가득 채워 단숨에 마셨다. 서아는 놀라서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말렸지만 우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나는 너랑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여기 있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네가 다른 남자 사귀면 그놈이랑 헤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뭐.”
“내가 강우혁 씨가 오라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 사람입니까? 나는 첸하고 헤어져도 당신은 싫어요.”
“맘대로 해. 싫어하든지 좋아하든지 그건 네 맘이니까 네 맘대로. 아직 너를 잊지 못해서 이렇게 매달리는 나는 또 내 맘대로.”
우혁은 첫 잔처럼 무식하게 마시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와인을 마셨다. 가끔 에스카르고나 송아지 스테이크를 먹기도 했지만 줄곧 와인을 마셨다.
“그렇게 마시다 정신 못 차리면 나는 파리 길바닥에 우혁 씨 내버리고 갈 거예요.”
“맘대로 해. 여기 한국 관광객 많은 곳이니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겠지. 그중 한 명쯤은 내 팬이 있어서 하룻밤 친절을 베풀지 않을까?”
“과연 그럴까요?”
“궁금하면 해보면 되겠네. 날 내버리고 가면 되는 거야.”
우혁은 와인을 두 병이나 마시고 혀가 모두 풀려버렸다.
“미안하다. 서아야. 내가 너를 보내고 얼마나 괴로웠는지 몰라. 그 동영상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봐도 너만은 보지 않게 하고 싶었어.”
“나한테 그 마음을 설명했으면 될 일인데. 당신은 진짜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을 지경이에요.”
“알아 나 바보라는 거 아는데…….”
우혁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테이블에 엎어졌다. 놀란 서아가 다가가 우혁의 뺨을 살짝 두드렸다.
“오빠, 우혁 오빠.”
우혁은 웅얼웅얼 거리며 손만 휘휘 내저었다. 서아는 주위 관광객과 웨이터 보기 부끄러워 재빨리 계산서를 부탁했다. 웨이터가 보기에도 방치하면 안 될 것 같은지 재빠르게 계산을 해줬다.
서아는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우혁이 정신을 잃는 바람에 음식값을 계산하며 우혁을 한 번 더 쏘아보았다.
이 돈이면 서아의 열흘 치 식비였다. 덩치가 큰 우혁을 혼자 힘으로 일으키지 못해 결국 웨이터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웨이터는 택시까지 잡아서 태워주었고 서아는 그에게 또 팁을 주어야 했다.
“오빠, 어디 호텔에 있어?. 숙소 어디야?”
서아가 우혁의 몸을 흔들며 계속해서 물었지만 우혁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서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결국 서아는 그를 샤틀레 가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서아가 장신의 우혁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집안으로 들어가자 첸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서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민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미안 첸. 오늘 하루만 여기서 재워야 할 것 같아.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돼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집을 오염시키거나 하는 건 곤란해. 만약 침구나 다른 곳에 토하거나 하면 추가 요금을 청구할 수밖에 없어.”
“그건 얼마든지 낼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서아는 우혁을 끌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뉘었다. 우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아의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우혁의 재킷을 벗기고 신발과 양말까지는 벗겼지만 차마 벨트 버클에는 손을 댈 수 없어 망설였다. 서아가 주춤하는 사이 우혁이 갑자기 눈을 뜨고 그녀를 낚아챘다.
우혁이 서아를 침대에 눕혀 찍어 누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던 남자는 어디로 가고 멀쩡한 우혁이 미간을 찡그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같이 살기는 같이 사는구나. 그래서 그렇게 호기롭게 부모님을 걸었지?”
“뭐야? 술에 취한 거 아니었어?”
우혁이 피식 웃으며 머리를 낮추어 서아와 코가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취하기는 했지. 하지만 아무리 취해도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게 취하지는 않았지.”
“이런 나쁜 자식!”
서아가 주먹으로 우혁의 어깨를 때렸다. 하지만 우혁은 그런 서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첸이 집주인이구나?”
“대답 안 해!”
“추가 요금 청구할 일 없을 거라고 해. 나는 남의 집에다 토해놓는 그런 한심한 놈 아니거든.”
“비켜, 어서 놔줘.”
“정말 내가 널 놔주기 바라니? 내가 여기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너에게서 물러나기를 원해?”
순간 서아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네가 내 옆에서 사라지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줄 알았어. 너를 알지 못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 예전처럼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안 되더라. 이제 은서아 없는 강우혁은 아무것도 아니더라.”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그렇게 쉽게 나를 내쳐놓고 이제 와서 믿으라고?”
“어떻게 해야 나를 믿을 수 있겠니?”
우혁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게 와인 냄새와 뒤섞인 블랙베리 향수 냄새가 났다. 그 향기에 그만 코끝이 찡해졌다. 우혁의 체취가 섞인 블랙베리 향기와 그냥 블랙베리 향수의 향기는 전혀 다른 느낌이 난다.
이 냄새는 오직 우혁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향취다. 서아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블랙베리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