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셰프 재킷을 입은 서아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모아 묶고 망으로 감쌌다. 왼쪽 가슴에 자랑스럽게 빛나는 푸른색의 르 꼬르동 블루 마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심호흡했다. 알라메종의 김 사장이 말끝마다 르 꼬르동 블루 타령을 할 때면 선망 반 아니꼬움 반이었다.
르 꼬르동 블루 생활을 해본 지금 김 사장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도 한국으로 돌아가 파티세리 일을 대충 하는 사람을 보면 김 사장처럼 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만큼 엄격하고 고된 생활이다.
그 엄격함이 어찌나 치밀한지 레시피에 달걀노른자를 80그램 넣으라고 했을 때 노른자가 100그램이면 잘라서 80그램만 써야 한다. 절대 달걀 한 개 따위의 레시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랑 수플레를 만드는데 설탕을 116도로 끓이라고 하면 온도계로 정확히 116도가 될 때까지 끓여야 한다.
알라메종에서 팀장이 이런 식으로 요구할 때는 공연히 르 꼬르동 블루 티 내려고 그런다며 은지와 같이 흉을 보고는 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파티세리에서 레시피는 바이블이자 코란이다.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절대 안 되는 곳이 바로 파티세리의 주방이었다.
서아는 삼 년의 대학 과정이 아니라 팔 개월의 실습 과정을 수료 중이다. 그중 초급을 마쳤고 지금 중급 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 처음에는 언어 문제 때문에 좀 힘들었지만 곧 페이스를 되찾아 초급반에서 구십 점을 넘게 받고 우등으로 졸업했다. 서아의 목표는 중급과 상급도 모두 우등 졸업하는 것이다.
탈의실에 들어온 안나가 서아를 보더니 환호성을 지르며 어제 그 남자 누구냐고 묻는다. 핸섬을 연발하는 안나의 눈이 반짝거린다. 서아는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남자 친구라는 나와 버렸다.
“남자 친구 있다는 말 하지 않더니 웬일이야?”
안나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짝 대들었다. 서아는 안나가 더 캐묻기 전에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수업을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국 실습 시간에 다크초콜릿 커버춰(couverture)를 만드는
데 생크림을 너무 많이 넣었다.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하느라 허둥지둥 댔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모습에 셰프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오늘 무슨 일 있니?”
서아는 아니라고 그저 좀 피곤할 뿐이라며 급하게 다시 만들었다. 항상 제일 먼저 실습을 마치던 서아가 늦자 다들 신기한 듯 흘끔거렸다. 안나가 소문을 냈는지 동급생들은 궁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서아는 동급생들의 질문을 피하기 위해 제일 먼저 탈의실로 달려갔다. 서양 친구들은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만난 동급생들은 서아의 예상과 다르게 남의 일에 꽤나 관심이 많고 오지랖도 넓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어찌 되었든 오늘 하루도 이렇게 지나갔다. 가방에는 그녀가 만든 가토 쇼콜라 그리오트(Gateau chocolate griottes)가 있고 오늘도 셰프의 평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구십 점을 넘겨 우등 졸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 서아의 앞을 막고 서 있는 저 남자만 빼면 말이다.
‘강우혁!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오늘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예쁜 스쿠터를 타고 나타났다.
“오빠 차 뽑았다. 타라.”
으스대는 우혁의 모습에 서아는 웃음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웬 스쿠터?”
“지난번에 네가 첸의 자전거에 넙죽 올라타는 걸 보고 내가 자전거보다 한수 위인 걸 준비했지. 타라.”
서아가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동급생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서아는 생각이고 뭐고 필요 없다는 듯 재빨리 우혁의 뒤에 올라탔다.
“길을 알기는 하는 거야?”
서아의 말에 우혁이 크게 소리 질렀다.
“아니, 몰라. 너랑 같이 있는데 길 따위 잃어버리면 어때.”
서아는 오래 입어서 실금이 간 우혁의 가죽 재킷에 뺨을 댔다. 어제부터 대중교통이 파업이라 파리 교통이 엉망인데 우혁의 스쿠터는 꽤 요긴했다. 그렇지 않으면 집에 가는 데 애를 먹었을 것이다.
우혁의 스쿠터는 집이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서아는 우혁이 길을 잃었다고 생각해서 그의 등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 아니야. 집은 저쪽으로 가야지!”
우혁이 대답을 하지 않고 가기만 했다. 당황한 서아가 우혁의 등을 조금 더 세계 쳤다.
“오빠, 여기 아니라니까.”
우혁은 그제야 스쿠터를 잠시 세우고 뒤를 돌아봤다.
“나는 왜 네가 오빠라고 부르는 게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오빠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에펠탑 사진 찍으러 가는 거다.”
서아는 그제야 자신이 엉겁결에 우혁을 오빠라고 부른 것을 깨닫고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
“너, 에펠탑 가봤냐?”
서아가 고개를 숙이고 스쿠터의 시트를 만지작거렸다. 반짝이는 새 스쿠터의 까만색 시트가 유난히 반질거렸다.
“아니, 지나가다 보기는 했지만 가보지는 못했어. 내가 관광객도 아니고 그럴 여유가 없어서.”
“야, 아무리 관광객이 아니라지만 파리에 온 지 넉 달이 넘었는데 아직 에펠탑도 안 가봤단 말이야. 내가 안 왔으면 우리 서아 돌아갈 때까지 에펠탑 앞에서 사진 한번 못 찍었겠다.”
에펠탑을 보러 가겠다고 했던 우혁은 에펠탑으로 직접 가지 않고 사이요(Chaillot) 궁전으로 향했다. 서아가 왜 이곳으로 오냐고 하자 우혁은 대답 대신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답은 사이요 궁전에 도착해 카메라 앞에 서서야 알게 되었다.
“막상 에펠탑에 가면 카메라에 에펠탑이 다 담기지 않아. 그래서 에펠탑이랑 너랑 같이 담으려고.”
서아가 에펠탑이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서자 화이트 에펠탑이 시작되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술렁대며 일어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에펠탑을 구경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낡은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 하나만 걸친 서아가 불빛이 찬란하게 움직이는 화이트 에펠탑을 배경으로 수줍게 웃고 있었다. 우혁은 삼각대를 세워놓고 서아에게 초점을 맞춘 뒤 재빨리 달려가 그녀 옆에 섰다.
우혁과 같이 사진을 찍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서아가 우혁을 올려다보는 순간 셔터가 눌렸다.
“야, 너는 지금 나를 보면 어떻게 해?”
“나는 오빠가 같이 사진을 찍으러 올 줄 몰라서…….”
서아가 우물쭈물 거리며 대답을 잘 못 하자 우혁이 갑자기 그녀를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사진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서아가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데.”
우혁은 서아가 자신의 품을 빠져나가려고 할까 봐 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런데 의외로 서아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신혼여행도 못 같잖아.”
“그렇구나.”
우혁은 신혼여행도 다녀오지 못하고 파국이 난 결혼을 생각하자 속이 싸하게 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