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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확실하게 외조

by 은예진

우혁이 호텔에서 옮긴 짐은 의외로 간단했다. 말은 서아가 공부 끝날 때까지 있을 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서아는 28인치 캐리어 하나 달랑 들고 오는 우혁을 보자 공연히 심술이 났다.


‘뭐야? 나랑 계속 같이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고작 캐리어 하나? 앞으로 사 개월은 더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서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혁은 서아랑 같은 집에 살게 된 것이 그저 좋은지 얼굴 근육이 죄다 풀어져서 바보처럼 실룩거렸다. 서아는 자신의 서운한 마음을 들킬까 봐 입술을 내밀고 쿵쿵 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혁은 자신이 그녀가 사는 집으로 들어온 게 못마땅해서 화를 내는 줄 알고 문 앞에서 전전긍긍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서아야, 내가 너 성가시게 하려고 들어온 게 아니고 네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도록 네 뒷바라지하려고 온 거야. 그러니까 너무 화내지 마.”


방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애원하는 우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헉, 내가 지금 자기가 들어온 것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흠, 이거 괜찮은데.’


서아는 우혁의 말을 듣고 갑자기 목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가 말과 다르게 금방 갈 것 같아서 섭섭한 마음은 절대 들키면 안 되니 우혁이 생각하는 대로 밀어 붙어야 했다.


“뒷바라지는 무슨 뒷바라지? 내가 공부하는데 오빠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너, 여기 집세 아끼려고 청소한다며. 모자란 집세 그거 내가 내주면 안 될까?”


거울을 보고 화가 잔뜩 난 표정을 지은 서아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 가까이 얼굴을 대고 있던 우혁이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오빠는 뭐든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지?”

“아니야, 절대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좋아. 네가 하던 집안 청소 그거 내가 할게.”

“오빠가 청소를 한다고?”


서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혁을 위아래로 훑어보자 그는 턱을 끄덕이며 자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청소뿐만 아니라 너의 모든 식사를 책임질 거야. 한마디로 확실하게 외조를 할 거다 이거지.”

“아니 천하의 강우혁이 왜?”


서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삐딱한 눈길로 우혁을 바라보았다. 우혁은 그런 서아의 태도에 전혀 상관없다는 듯 싱글거리고 웃었다.


“한국에서 네가 내 가사도우미였다면 이곳에서는 내가 이 강우혁이 은서아의 가사도우미가 되겠다고 자청하는 거지. 내가 지은 죄가 있으니까 그렇게라도 해서 용서받으려고.”


팔짱을 낀 서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자기가 잘못한 줄은 아는구나?”

“알지, 아주 잘 알지.”


너를 보내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예전만큼은 아니더라고 예전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아니 힘들다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암흑 속에 갇혀버린 것만 같았다.


어떻게 집행자 시즌 투를 찍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를 떠나보내고 남은 나는 왕자님을 잃어버린 인어공주처럼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우혁은 문을 잡고 비스듬히 기대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감정들을 삼키며 그저 서아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나 좀 나가게 비켜줄래?”


문을 가로막고 있던 우혁은 서아의 채근에 화들짝 놀라 문에서 손을 놓았다.


“한인 마트에 다녀오려고 하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우혁의 말에 서아가 자기도 모르게 양손을 모으고 반응했다.


“오빠가 해주는 참치김치 볶음 먹고 싶다.”


서아는 말을 해놓고도 민망한지 재빨리 손을 내려놓고 흠흠 소리를 냈다.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서아가 횡설수설하는 사이 우혁은 벌써 나갈 준비를 마치고 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기다려, 내가 참치김치 볶음 말고도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우혁이 스쿠터 키를 가지고 나간 사이 리포트를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은 서아는 자꾸만 문 쪽을 흘끔거렸다. 뭐가 궁금한지 몰라도 우혁의 방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가 28인치 캐리어 안에 뭘 가지고 왔을지 궁금했다. 궁금할 것도 없는데 궁금한 이 마음은 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문이나 한 번 열어 보자.’


집에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우혁의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그리운 블랙베리 향이 물씬 풍겼다. 행거에는 기본 면 티와 진 종류가 서너 개 걸려 있었고 특별한 시간을 위한 슈트도 한 벌 있었다. 셔츠와 타이 두 개, 그리고 러닝화, 구두, 가벼운 보트 슈즈가 나란히 정리되어 있었다.


달랑 가방 하나 들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가방에서 나온 물건들은 몇 달쯤 너끈히 지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해 보였다. 비어 있는 책상에는 서아와 우혁을 이어준 아빠의 책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책과 아이패드 옆에 액자 하나가 서 있었다.


서아와 우혁이 나란히 서서 찍은 결혼사진이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이혼 통보를 받고 우혁의 집을 나오느라 결혼사진 같은 걸 처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때 기억했더라면 모두 없애 버렸을 텐데……

액자를 집어 든 서아는 우혁의 침대에 걸터앉아 사진 속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너는 참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해 보이는구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생각했다. 만약 지금의 기억을 다 가지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결혼을 하지 않고 그의 곁을 떠나는 게 맞을까? 상처받을 게 무서워 시작도 하지 않는 게 옳을까?


‘서아 너 다시 돌아가도 그와 결혼할 생각이구나. 바보같이.’


서아는 스스로 생각해도 좀 한심하다고 여기며 우혁의 침대에 모로 누웠다. 아직 우혁이 몸을 누여보지 않은 침대에는 우혁의 체취가 배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우혁의 옷을 꺼내 코를 묻을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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