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위에 몸을 옆으로 누이고 사진을 보고 있었다.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곧 일어날 생각이었다. 이러다 우혁이 오면 망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이 흐려지고 몸이 물속에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파리 특유의 냄새가 났다. 허브 냄새와 트러플 냄새 또 뭔가가 뒤죽박죽 섞인 파리의 골목 냄새였다. 그 냄새가 물러간 뒤끝에는 익숙한 블랙베리 향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서아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우혁의 차가운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잠결인 그녀의 입에서 나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우혁의 몸을 꽉 껴안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목덜미를 껴안고 있던 서아의 손이 셔츠 사이로 밀고 들어갔다.
손끝에 느껴지는 냉기에 그만 눈이 떠졌다. 우혁의 셔츠 속에 손을 집어넣어 그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서아가 움직임을 멈췄다.
서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우혁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깼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나는 죄 없어. 내가 너한테 자는 거냐고 묻자 갑자기 네가 손을 뻗어서 나를 끌어당겼어.”
“거짓말.”
서아가 우혁을 밀어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는 그의 몸을 끌어안고 싶었다. 냉기 가득한 그의 몸을 덥혀주고 싶었다.
“그럼 내가 내 방에 들어와 있는 너를 보고 이게 웬일인가 싶어서 덮쳤다고?”
순간 여기가 우혁의 방이라는 것을 깨달은 서아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방 정리는 잘 된 건가 살펴보려고 들어온 건데.”
“누가 뭐래? 얼마든지 들어와도 돼. 날마다 들어와서 검사해 주면 감사할 따름이야.”
서아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내가 뭐 하러 오빠 방을 날마다 검사하냐며 버럭 신경질을 냈다. 방을 나가려고 일어선 서아의 팔을 우혁이 잡아서 다시 침대로 끌어당겼다.
“가지 마라. 서아야.”
우혁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눈빛은 흐릿하게 번졌고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너를 안고 싶지만 네가 허락하지 않은 일 하지 않을게. 그냥 나 한 번만 더 안아주고 가라.”
그 말과 함께 우혁이 서아의 손목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뺐다. 네가 나를 뿌리치고 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가도 된다는 의미였다. 가도 된다고 하면 가면 그만인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서아가 도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빠가 예뻐서 이러는 거 아니야. 그냥 오빠가 좀 쓸쓸해 보여서…….”
서아는 그 말과 함께 팔을 벌려 우혁의 허리를 껴안았다. 우혁도 손을 들어 서아의 허리를 같이 감싸 안았다. 우혁의 들숨과 서아의 날숨이 뒤섞이며 공기가 달아올랐다.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턱대고 파리행 비행기를 끊고 사실 걱정도 많이 했거든. 나 엄청 뻔뻔하지?”
“내가 뻔뻔하다고 할까 봐 미리 선수 치는 거지?”
“응.”
우혁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밤새도록 이렇게 안고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너를 외조하기 위해 왔으니 그럼 안 되는 거지.”
“정말 여기서 나 디플로마(diploma) 과정 끝날 때까지 있을 거야?”
“당연하지. 내가 앞으로 다섯 달 동안 아무것도 안 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민석이 말을 들었는데. 민석이가 하라는 거 다 하고 온 거야.”
“장 대표님 불쌍해.”
“좀 그렇기는 하지?”
우혁이 턱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 같은 친구 놈을 만나 내 뒤치다꺼리하느라 매번 고생이 많아.”
서아를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나 지금이나 우혁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참 잘 아는 사람이다. 서아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 우혁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방문을 열었다.
우혁이 잔뜩 사다 놓은 물건들을 궁금한 듯 들여다보던 첸이 방에서 나오는 두 사람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축하해 두 사람!”
첸의 말에 서아가 손사래를 치며 그런 거 아니라고 오해하지 말라고 외쳤다.
“알아. 알아. 한국 사람들 그건 거에 엄청 부끄러워하잖아. 하지만 여기선 그렇게 부끄러워할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아니라니까. 정말 아니야. 오빠 말 좀 해줘요.”
서아가 우혁을 향해 울상을 지으며 빨리 해명하라고 했지만 우혁은 자신이 사 온 물건들을 식탁에 늘어놓으며 못 들은 체했다.
“첸도 같이 저녁 먹어. 내가 참치김치볶음을 해줄게. 내 특제 요리인데 맛이 기가 막혀.”
첸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우혁은 파리에서도 이천 쌀을 판다며 신기한 듯 꺼내 놓았다. 파리에 와서 한 번도 밥을 제대로 해 먹어 본 적 없는 서아는 쌀을 보자 갑자기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우혁과 첸 두 남자가 동시에 서아를 바라보며 너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인정할게. 맞아 나야. 쌀을 보니까 갑자기 참을 수 없게 배가 고프네.”
서아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자 우혁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서아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기다려.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밥 잘하는 법까지 배워 왔거든. 여기 주방에 무쇠 냄비가 있으니 밥은 걱정 안 해도 될 듯.”
우혁이 팔을 걷어붙이고 개수대 앞에 서서 쌀을 씻기 시작했다. 삼십 분쯤 물에 불려서 밥을 안치고 김치를 꺼내 썰었다. 참치김치를 볶아놓고 달걀말이까지 해가며 상을 차리는 속도가 예전 하고는 달랐다.
“나 쫓아내고 주방에서 밥만 했나? 어떻게 이렇게 솜씨가 좋아졌어?”
아직 밥이 다 되지도 않았지만 참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참치김치볶음을 먹으며 서아가 물었다. k마트 물건값이 너무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하던 서아는 오랜만에 먹어보는 김치 맛에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너 뒷바라지해 주러 왔다고 했잖아. 뒷바라지하려면 제대로 해야 해서 연습 좀 했다.”
“정말?”
서아가 젓가락을 입에 물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혁은 그런 서아의 코를 쥐고 흔들었다.
“그래 정말이다. 이제 너는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공부만 해서 르 꼬르등 블루를 우등 졸업하면 되는 거야.”
우혁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을 서아 앞에 내놨다. 그녀는 밥 냄새에 홀려서 우혁이 얼마나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