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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비죽 내민 입술

by 은예진

"노코멘트!”


“상관없어요. 내가 지금 그걸 캐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거 같은데.”

“네? 뭐라고요?”

“솔직히 구 작가가 목적 없이 나를 불러내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아닌가요?”

“아니거든요. 나는 그냥 장 대표님이랑 밥 먹고 싶어서 부른 거거든요.”


구 작가가 너무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민석이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목소리를 높인 장본인도 당황해서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입을 가린 손에서 반짝이는 네일 파츠를 본 민석이 신기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손톱이 예쁘네요.”


구 작가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사실 이런 거 처음이에요. 손끝을 자극하면 손톱이 빨리 자란다는데 제가 글을 많이 쓰니까 손톱이 정말 빨리 자라거든요. 그래서 긴 손톱에 네일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쉽지 않더라고요.”


구 작가가 구구절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민석은 그런 구 작가를 보며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매번 구작이라고만 불렀지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기억해내려 해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일몰 시간이 되면서 북한산 주변이 주황색과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커플들이 일어서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여자친구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는 남자들의 진지한 모습이 우습기까지 했다.


“구 작가 이름이 뭐예요?”

“네? 제 이름요? 갑자기 왜?”

“그동안 알고 지낸 시간이 꽤 됐는데 나는 구 작가님을 그저 구작이라고만 알고 있는 게 좀 그러네요.”


구 작가는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름이야 부르라고 만든 건데 알려드려야지요. 구선아입니다.”

“선아 씨? 예쁜 이름이네요..”


구 작가가 고개를 들고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나도 장 대표님 하지 말고 민석 씨 해야 하는 건가요?”

“그게 그런가…….”


민석은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 서아를 만나고 얼마 동안 아무도 모르게 마음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우혁과 열애설을 발표하면서 애써 접고 삼켜냈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서는 그저 애틋한 여동생처럼 느껴졌다. 가족이 없는 서아 씨의 든든한 친정 오빠가 되고 싶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여자한테 관심이 가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면 구선아와 썸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썸으로 가지 않으려면 확실하게 의사표시를 해야 한다. 공연히 헛된 기대감을 심어주고 나중에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는 건 비겁한 일이다.


마음을 결정지은 민석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밥은 먹은 걸로 해야겠는데요? 제가 일이 좀 있어서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밥을 같이 먹는 걸로 생각했던 구 작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민석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구 작가의 시선에 민석이 당황해서 고개를 떨어트렸다.


“막상 이름을 알고 나니까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될까 봐 두려우세요?”

“두렵지는 않습니다. 단지 오해가 생기면 뭔가 일이 좀 복잡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을 뿐입니다.”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는 게 이러다 이 여자랑 잘못 엮이면 곤란해지는데. 뭐 이런 생각?”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꼭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딱 보니 그런데. 됐어요. 저도 민석 씨랑 밥 먹고 싶은 생각 없어졌어요. 안녕히 가세요.”


구 작가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걸었다. 생전 처음 네일 파츠를 붙이고 어울리지 않는 치마에 힐까지 신었다. 왜 그랬느냐고 누가 물으면 뾰족하게 할 말이 없었다. 엉뚱한 부케를 받고 나서 감정이 갈피를 잃고 헤맸다. 은방울꽃 부케를 돌려주면서 뭔가에 홀리듯 그에게 빠져버렸다.


‘내가 미쳤지. 부케 하나 받았다고 정신이 이상해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다니.’


여자라고 고백 먼저 하지 말란 법 없고, 데이트 신청도 먼저 하지 말란 법 없다. 중요한 것은 여자도 남자도 거절당하면 부끄럽다는 사실이다. 한발 한발 걸으면서 그대로 바닥에 가라앉아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서 출입구가 어찌나 먼지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는 것 같았다.


테이블 두 개를 지나 카운터 앞을 걸어 나가던 선아의 발목이 오랜만에 신은 힐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꺾어졌다. 복숭아뼈가 바닥에 닿으면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괜찮아요?”


허겁지겁 달려온 민석이 선아의 발목을 잡았다. 그녀의 입에서 ‘아얏’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거 병원 가봐야겠는데요.”

“됐어요. 병원을 가도 내가 알아서 갈 테니 민석 씨는 바쁜 일 보세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럼 이게 말이지 발이에요?”


이런 상황과 통증 때문에 짜증이 난 선아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민석은 그런 선아를 빤히 보고 있더니 손을 내밀었다.


“다짜고짜 업히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니 내 손 잡고 일어납시다.”

“싫다니까요.”


선아는 민석을 무시하고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애를 썼다. 하지만 좀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보다 못한 민석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안아서 일으켜 세웠다.


“못 걸을 것 같은데요.”


선아는 걸음을 떼어보려 애를 쓰다 미간을 찡그리며 멈춰 섰다. 민석은 그녀의 팔을 잡아 자신의 목에 걸치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선아는 하는 수없이 민석의 몸에 의지해 다친 오른쪽 발꿈치를 짚어 가며 걸었다.


“이래서 안 하던 짓을 하면 꼭 사고가 터져요. 내가 무슨 치마를 입고 힐을 신는다고 미쳤지.”

“풋.”


민석이 선아를 부축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이 상황이 우스워요?”

“우스운 건 아닌데 웃음이 나오네요. 죄송합니다.”


민석이 자꾸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자 그에게 의지해서 걷던 선아도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가 생각해도 웃기네요. 담부터는 이렇게 촌스러운 짓 하지 말아야지. 앞으로 최소 오 년간 이불킥 감이네요.”


카페 건물 밖으로 나와 주차장을 향하던 민석이 마침 건물 맞은편에 있는 정형외과를 발견하고 턱짓을 했다.


“저기 갑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병원까지만 좀 데려다주세요.”

“그건 곤란한데요.”


발걸음을 멈춘 선아가 민석에게 의지했던 팔을 내리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진료 끝나고 집에까지 데려다 줄게요. 어떻게 병원까지만 데려다줄 수 있겠어요.”


그제야 선아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내가 책임져야지요.”

“칫.”


선아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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