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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내가 좋아서 하는 거

by 은예진

르 꼬르동 블루에는 요리를 가르치는 퀴진(cuisine)과 디저트를 가르치는 파티세리(patisserie) 두 과정이 있다. 거칠고 마초 성향의 퀴지니에(cuisinier)들은 파티시에(patissier)들을 계집애 취급하며 무시한다. 반면 파티시에들은 고깃덩어리가 식탁을 지배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섬세함을 강조한다.


거친 욕설이 난무하는 퀴진과 다르게 예민한 신경전이 주를 이루는 파티세리 수업에서 오늘은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있었다. 수업 중 오븐 사용 때문에 레아와 장루이가 신경전을 벌였다. 셰프가 오기 전에 진정이 되기는 했지만 얼굴을 붉히고 어색한 분위기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런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안나가 수업이 끝난 뒤 가볍게 한잔하자며 사람들을 모았다. 서아도 당연히 참여하겠다며 손을 들었지만 걸핏하면 학교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 우혁이 신경 쓰였다.


제발 학교까지는 데리러 오지 말라고 사정했지만 우혁은 갖가지 핑계를 만들어 스쿠터를 타고 학교 앞으로 왔다. 오늘 신경전을 벌인 레아와 장루이를 비롯해 안나와 그녀까지 대여섯 명이 계단을 내려갔다.


“네 남자 친구도 같이 가자.”


서아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역시나 우혁이 눈치 없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유월 햇살을 받은 우혁의 머리카락이 유난히 검은색을 발하며 반짝거렸다.


“네 남자친구 키아누리브스 닮았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니 같이 가자.”


안나가 속삭이며 서아의 옆구리를 찔렀다. 서아는 나오지 말라니까 기어코 나와서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우혁에게 눈을 흘겼다.


“나도 좀 개인 생활이라는 것도 즐겨보자. 매일 이렇게 나와서 기다리면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잖아.”

“어울려. 얼마든지 어울려. 나는 거기서도 기다릴 수 있으니까.”


서아는 머리를 흔들며 부담스럽다는 말을 반복했다.


“부담스러워하지 마.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그때 안나가 끼어들어 우혁을 향해 술집에 가서 가볍게 한 잔 하자며 청했다. 우혁은 좋아서 입꼬리가 광대에 가서 걸렸다. 서아가 눈치를 주며 그냥 가라고 했지만 우혁은 못 들은 척 따라나섰다.


소고기와 레몬 버터소스를 곁들인 민어구이, 양념 돼지고기를 시키고 와인을 마시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레아와 장루이의 신경전 때문에 모인 자리였지만 이유 따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영어와 불어 한국말과 스페인어가 뒤죽박죽 섞여 대화답지 않은 대화가 잘도 이어졌다. 술에 취하자 레아가 갑자기 우혁에게 파리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거냐고 물었다.


“서아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어. 그게 다야.”


그 말에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키아누리브스를 닮은 멋진 남자가 오직 그녀만을 위해 파리에 와 있다니 그보다 멋진 일은 없다고 난리였다.


와인을 세 병쯤 마시고 헤어졌다. 서아는 취했고 우혁은 알딸딸했다. 스쿠터는 술집 앞에 세워둔 채 천천히 걸었다. 밤이 깊은 파리의 거리에는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니는 관광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혁이 팔을 뻗어 서아의 손을 잡았다. 서아는 흐릿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우혁과 눈이 마주쳤다.


“여기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어.”

“나랑 같이 있으니까 몰라도 상관없어.”

“그런 거야? 그런데 당신도 누군지 모르겠어.”


서아가 우혁을 붉은색 벽돌 건물 외벽에 밀어붙이며 말했다.


“그건 곤란한데.”

“곤란할 거 없어. 차라리 모르는 남자가 편해. 난 오늘 밤 모르는 남자와 시간을 보낼 거야.”


우혁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서아는 그런 우혁의 가슴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날 버린 강우혁은 필요 없어. 모르는 남자가 더 좋아.”

“상처받게 해서 미안하다.”

“당신이 왜? 당신은 모르는 남자지 강우혁이 아닌데.”

“어쩌지? 나는 당신의 전남편 강우혁인데.”

“그 입 다물어.”


서아는 우혁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입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입술로 말을 막아 버리는 거다. 서아의 입술이 우혁의 입술을 덮었다.


시큼한 와인의 맛이 혀에 닿았다. 뒤꿈치가 한껏 들리고 우혁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면서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때까지 움직임이 없던 우혁이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를 거칠게 안았다.


어두운 파리의 거리는 세상에서 키스하기 가장 좋은 곳이다. 젖은 입술이 부딪치며 내는 축축한 소리만 귀에 들릴 뿐 아무것도 없었다. 몸도 사라지고 마음도 사라지고 남은 것은 서로의 입술을 조금 더 강하게 원하는 욕망뿐이었다.


서아의 손이 먼저 우혁의 셔츠 속으로 파고들었다. 우혁은 서아의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쇄골 언저리에 입술을 댔다. 여기가 자동차 안만 되었어도 아니 남들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가릴 뒷골목이라도 되었으면 어디까지 갈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우혁의 셔츠 속에 손을 넣어 마구 헤집던 서아가 그에서 몸을 떼어냈다.


“여기까지. 모르는 남자와의 키스는 여기까지.”


우혁이 서아가 뭉개놓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럼 이제 강우혁하고 한 번 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싫어. 난 강우혁 용서 안 할 거야.”

“서아야!”


우혁이 서아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내가 어떻게 해야 실수를 만회할 수 있겠니?”

“모르겠어. 오빠를 잊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야. 나 강우혁 사랑했어. 지금도 오빠를 보면 내 안에 여자가 아우성을 쳐. 오빠 품에 안기고 싶어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아.”

“나도 그래.”

“그런데 이렇게 다시 어영부영 오빠랑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다 무슨 일이 생기면 또다시 내쳐질 것 같아. 오빠를 믿을 수 없어.”

“어떻게 해야 깨진 신뢰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까?”


우혁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촉촉한 눈동자로 서아를 바라보았다. 서아는 손을 들어 우혁의 뺨을 만졌다.


“그걸 나도 모르겠어. 알면 정답을 가르쳐줄 텐데 내가 모르는 답을 어떻게 알려줄 수 있겠어.”


우혁이 서아를 껴안고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턱을 댄 우혁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 가진 건 시간밖에 없어. 우리 같이 알아가 보자. 재촉하지 않을게.”


서아는 우혁이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기다리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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