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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핑크색 거품

by 은예진

밤새 연습하고 새벽녘에 잠이 든 서아가 눈을 번쩍 떴다. 오늘이 드디어 중급과정 파이널 프랙티컬 테스트가 있는 날이다. 서아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 우혁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찹쌀떡과 엿을 안겨주었다.


“합격은 당연한 거고 우등으로 붙으라고 주는 거야.”

“고마워.”


서아는 가볍게 우혁의 뺨에 키스하고 찹쌀떡 하나로 아침을 때웠다. 데려다준다는 우혁의 성화를 간신히 말리고 혼자 학교까지 갔다.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해내고 싶었다. 그래야 결과도 오롯이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아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모두 긴장해서 어쩔 줄 몰랐다. ‘향신료를 넣은 망고 무화과 다쿠아즈 케이크’와 ‘초콜릿 바나나 사블레 브르통(sable bretone)’ 중 하나를 제비 뽑기로 정해서 시간 내에 만들어야 한다. 서아는 다쿠아즈 케이크를 잘 만들기 때문에 제발 다쿠아즈 케이크가 걸리라며 두 손 모아 빌었다.


그녀가 다쿠아즈 케이크를 강렬하게 원하는 모습을 보던 안나는 정말 다쿠아즈 케이크를 뽑은 서아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운도 도와준다니까.”


안나가 서아의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며 자신의 것을 뽑으러 나갔다. 그녀는 초콜릿 바나나 샤블레 브르통을 뽑고 어깨를 으쓱했다.


중급 시험은 초급 시험에 비해서 조금 더 난이도가 있어 쉽지 않았다. 오븐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만 같았고 머랭을 올리다 핸드믹서가 고장 나서 부랴부랴 다른 것으로 교체해야 했다. 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초콜릿 다쿠아즈를 먼저 만들고 오렌지 치즈크림을 만들었다. 170도에 20분 구운 다쿠아즈에서 달콤한 냄새가 새어 나온다. 다쿠아즈 위에 오렌지 치즈크림을 얹고 망고와 무화과, 오렌지와 키위까지 세팅했다. 마지막에 향신료로 쓰일 바닐라빈 2개를 올렸다.


바닐라빈이 올라가자마자 종료음이 울렸다. 서아는 걸음을 옮길 여유조차 없어서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향신료를 넣은 망고 무화과 다쿠아즈를 한 손에 들고 천천히 걸어가는 서아의 모습은 영혼까지 소진시켜 버린 껍데기처럼 보였다.


집으로 들어서자 우혁이 양팔을 벌려 그녀를 안아주었다. 서아는 자신을 기다려주는 우혁을 보며 짧았던 결혼생활을 떠올렸다. 그때는 서아가 집에서 우혁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제 우혁이 서아를 기다려주는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가서 닿자 묘한 쾌감이 몰려왔다. 그때 우혁이 서아를 내치지 않았다면 서아는 절대 파리로 공부하러 올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로 힘들었지만 덕분에 이렇게 파티시에를 향해 한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시험 잘 봤어? 일등 할 것 같아?”

“일등은 무슨…….”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초급반을 이등으로 통과했고 중급반에서는 항상 셰프 피에르의 칭찬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우등 수료는 당연한 거고 욕심 같아서는 정말 일등으로 끝내고 싶었다.


“서아 너 피곤할까 봐 내가 목욕물 받아놨어.”

“욕조도 없는데 어떻게 목욕물을 받아?”

“이 날을 위해 내가 특별히 욕조를 마련했지.”


우혁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서아를 데리고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욕실은 너무 작아서 욕조를 놓을 수 없었다. 고민하던 우혁은 테라스에 놓을 이동식 욕조를 구입했다.


창밖에서 그녀의 모습이 보일까 봐 블라인드를 내려놓은 테라스에는 우아한 흰색 욕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첸이 여기다 이걸 놔도 된대?”


우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첸이 우리 집에도 욕조가 생겼다며 엄청 좋아하던데. 자기도 이제 욕조에서 스마트폰을 보며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게 됐다고 신났어.”


욕조 안에는 핑크색 거품이 가득했고 거품에서는 장미 향이 뿜어져 나왔다. 서아는 그 장미향에 홀린 듯 우혁이 시키는 대로 욕실에서 샤워가운을 입고 나왔다. 우혁은 거품 욕조 안으로 들어가는 서아를 배려하기 위해 커튼을 쳤다가 다시 걷었다. 욕조 안에 들어가 앉자 거품이 목까지 차올랐다.


우혁은 가벼운 샴페인 잔을 서아에게 안겨주고 욕조 뒤로 가서 그녀의 굳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서아야.”

“고생한 건 사실이지만 이런 호사는 어쩐지 불안한데.”

“불안하거나 불편할 거 하나도 없어. 우리 집에서 네가 나한테 해줬던 그 많은 일들에 비하면 내가 너한테 해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서아의 견갑골을 풀어주던 우혁의 손이 점차 등으로 내려가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서아는 그런 우혁의 손길에 몸이 떨리는 것을 참느라 샴페인 잔을 꽉 움켜잡았다. 이렇게 끌려가고 싶지 않았지만 차마 그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지난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시험 준비를 했고 그 시험이 끝난 지금 그녀는 무엇보다 릴랙스가 필요했다. 짜릿한 우혁의 손길은 긴장감과 릴랙스를 동시에 선사한다.


수국과 모카라, 리시안셔스, 유칼립투스 등을 이용해 하트 모양을 만들어 장식해 놓은 꽃은 마치 당신을 사랑한다고 노래 부르는 것 같았다. 서아는 슬그머니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우혁의 손이 서아의 옆구리에서 다시 등으로 옮겨가며 부드럽게 문질렀다. 순간 서아가 거품이 잔뜩 묻은 팔을 뻗어 우혁의 목을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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