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파티세리 수업이 없는 대신 불어 랭귀지 수업이 있는 날이다. 오천만 원이 큰돈이지만 제과 디플로마 수업료인 삼만 유로를 제외하면 숙식을 해결하기에도 빠듯한 돈이다. 그걸 아는 채영이 억지를 부리다시피 하며 랭귀지 스쿨 비용을 보내줬다. 나중에 근사한 디저트 카페 차려서 갚으라는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정말 받으려는 마음은 없어 보였다.
서아는 점점 늘어나는 마음에 빚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채영의 말마따나 배우러 왔으면 확실하게 배우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 두 눈 질끈 감고 받기로 했다. 덕분에 공부해야 할 것은 더 늘어나 정신이 없었다.
르 꼬르동 블루에서 같이 운영하는 랭귀지 스쿨에는 전 세계 각지에서 온 요리사 지망생들이 수업에 필요한 불어를 배우고 있다. 다국적 친구들과 얕은 영어와 더 얕은 불어 그리고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수업이 일찍 끝나 가까운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포르투갈에서 온 안나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서아는 한숨을 쉬며 걸음을 멈추었다. 우혁이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피하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확실하게 해결을 보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아무 데서나 두더지 인형처럼 튀어나올 것이다.
서아는 친구들에게 갑작스럽게 일이 생겼다며 사정을 이야기하고 우혁을 향해 걸어갔다. 같이 걷던 친구들은 훤칠한 키에 잘생긴 남자를 향해 가는 서아를 보고 휘파람을 불어댔다.
“우리 다 끝난 거 아니었나요? 강우혁 씨가 저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저녁 먹으며 이야기 좀 하자.”
“내가 왜 우혁 씨랑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서아가 발을 구르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혁은 그런 서아의 짜증이 전혀 상관없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택시를 불렀다. 엉겁결에 우혁을 따라 택시에 탄 서아는 그가 몽토르게이(Montorgueil) 거리의 레스카르고(L’escargot)를 가자는 말에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파리 왔으니 에스카르고(escargot)는 먹고 가야겠다 뭐 이런 마음이에요?”
“너 먹어봤냐?”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으니까 레스토랑에서는 못 먹어보고 야시장에서 먹어봤어요.”
“은서아.”
우혁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서아의 이름을 불렀다. 서아는 무슨 일인가 싶어 옆에 앉은 우혁을 흘끔 바라보았다.
“너, 계속 그렇게 존댓말 쓰고 강우혁 씨라고 할 거니?”
“그럼 강우혁 씨한테 강우혁 씨라고 하지 뭐라고 해요?”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라.”
서아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택시가 몬토르게이 거리로 들어섰다. 차에서 내린 서아는 레스카르고보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스토레(storher)를 향해 걸었다.
“여기는 루이 15세의 부인인 마리 레진의 파티시에였던 니콜라스 스토레가 1730년에 문을 연 곳이래요.”
서아가 황홀한 눈빛으로 진열된 디저트 종류들을 바라보았다. 우혁은 그녀의 눈빛이 어찌나 사랑스러웠는지 디저트에게 질투를 느낄 지경이었다. 서아가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계속 바라보고 있자 우혁은 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 뭐해요?”
서아가 묻기도 전에 우혁은 스토레 안에서 디저트를 담아 포장했다.
“오다 주웠으니 너 먹어라.”
우혁이 봉투를 서아 품에 안겨주고 앞장서서 걸었다. 서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트리며 우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 해? 어서 와. 나 배고파.”
서아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부르는 우혁을 향해 엉거주춤 걸었다. 레스카르고에는 우혁의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었다.
“내가 거절하고 가버렸으면 어쩌려고 예약까지 했어요?”
“그럼 민석이 불러서 먹어야지.”
“장 대표님도 같이 왔어요?”
서아가 놀란 듯 묻자 우혁도 같이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참 여기 파리지. 민석이는 바빠서 못 오지. 내가 좀 큰 사고를 쳐서 수습하기 바쁘거든.”
“무슨 사고를 쳤는데요.”
서아는 식전 음료로 나온 샴페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며 물었다.
“내가 서아 네가 공부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했거든.”
놀란 서아가 하마터면 입에 머금은 샴페인을 뿜어낼 뻔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나, 여기서 계속 너랑 같이 있을 거라고.”
“왜요?”
우혁은 몸을 뒤로 젖히며 샴페인을 느긋하게 마셨다.
“너 없이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 널 그렇게 보낸 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어떻게든 되돌려야지.”
“내 마음은요? 나는 되돌릴 마음이 전혀 없는데 혼자 되돌린다고 될 일이에요?”
“서아야,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우혁이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마침 웨이터가 에스카르고 요리를 가져오는 바람에
우혁은 재빨리 손을 내리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늦었어요.”
서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지난번에 봤던 자전거 타고 갔던 첸 기억나요? 나 그 사람하고 같이 살아요.”
“거짓말.”
“내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우혁 씨한테 그런 거짓말할 이유가 없어요.”
우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꽉 다문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우혁 씨가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그게 현실이에요. 난 우혁 씨랑 이혼했고 이후의 삶은 내 자유니까요.”
테이블에 시켜놓은 황금빛 소스를 듬뿍 얹은 에스카르고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