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대전까지 가서 반고흐전을 보게 됐다. 대전 시립미술관은 예술의 전당과 한밭수목원을 비롯해 엑스포시민광장까지 모두 모여있는 둔산대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전문화시설 총집합이라고 하겠다. 덕분에 마라톤대회가 있는 것을 모르고 간 나는 주차장을 하염없이 돌게 되었다. 그나마 마라톤이 일찍 끝났는지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기며 겨우 한자리를 찾았다.
대전은 나와 별 인연이 없는 도시였다. 대학 졸업하고 다니던 직장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 때문에 다니기는 했지만 그때 간 곳이 어디였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버스에서 소매치기당했던 아픈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다.(칠칠맞지 못한 내가 어디서는 소매치기당하지 않았을까. 청주에서도 서울에서도 천안에서도...... ) 그런데 사위가 대전에서 대학을 나왔고 사돈댁이 대전 인근이라 상견례와 결혼식을 대전에서 했으며 우리 아기 백일도 대전에서 했다. 이어서 사돈댁 결혼식이 있어서 또 대전에 가는 식으로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진 도시다.
그런데 이날의 대전은 평소와 좀 달랐다. 장태산에서 내려오는 길, 사돈댁이 탄 차자를 따라가느라 속도가 늦어졌는데 뒤에서 빵빵대며 재촉하는 소리가 나더니 가는 곳마다 경음기 소리가 들렸다. 끼워줘야 할 곳에서 절대 양보하지 않는 차와 어린이보호 구역에서 30킬로로 간다고 경음기를 울리는 차까지 뭐에 쓰인 것처럼 사람들이 신경질적이었다. 내가 이런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스레드에 '대전 왜 이러지?'라는 글을 올렸다가 요란한 싸움이 벌어졌다. 대전 원래 그렇다와 대전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이 소란을 피워 평소 나의 스레드와 어울리지 않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리고 누군가 내가 그날 만났던 이상한 사람들을 대전이라는 도시와 동일시하는 바람에 그런 거라고 지적했다. 내가 잘못한 거 맞는구나 싶었다.
이날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전시장에서 자신의 샤넬 백팩으로 나를 계속 치던 사람이 내게 떨어져서 걸으라고 신경질 내던 게 아니었나 싶다. 일요일 오전 반고흐 전은 사람이 많은 곳인데 거기서 백팩에 맞은 사람이 잘못한 건지 나는 알도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누군가 한화 연승이 깨져서 그렇다는데 정말 그래서 사람들이 죄다 신경질적이었나 싶다.
예전에 인상파 전시회에 갔을 때도 느꼈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모이면 제대로 관람하기가 어렵다. 평일 오전에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보니 사람들에 치여서 밀리다 보면 어느새 전시가 끝나있다. 고흐의 그림은 그 넘치는 아우라로 보는 사람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키지만 그걸 제대로 느낄 시간이 없다.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어쩌겠는가. 예상했던 일이니 그 한계 안에서 즐겨야 한다.
나는 서사를 좋아하고 그림 전시에도 서사가 있다는 것을 깨닫자 보는 재미가 늘어났다. 구상에서 비구상 쪽으로 흐르는 전시가 있는가 하면 시대순으로 가는 전시도 있다. 개인전도 초기에는 구상 쪽에 가깝고 후기로 갈수록 비구상이 되는 피카소와 비슷한 경우가 많다. 고흐는 인상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니 구상과 비구상의 흐름이 아니라 색채의 흐름이 서사를 만드는 경우다.
1기 네덜란드 시기 1881~ 1885
많은 데생과 습작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일천장에 이르는 데생 작업을 했다는 그의 작품들은 신들린 듯 움직이는 펜이 보이는 것만 같다. 아직 색을 찾지 못한 그의 그림들은 어둠에 갇혀있다. 일만 시간의 법칙이 성공의 규칙이라고 하면 일천장의 데생은 고흐의 규칙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들은 그가 불행했다고 하지만 몰입해 본 사람들은 안다. 그 몰입의 순간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이제 조금씩 이전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동생 테오에게 편지 쓰는 고흐는 행복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감자 먹는 사람들이 탄생했다.
2기 파리 시기 1886 ~ 1888
이제 고흐의 작품에 빛이 들어온다. 1880년부터 1914년까지 프랑스는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 아름다움의 정수인 파리에서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색을 얻었다. '식당 내부'와 같은 그림에서 고흐의 붓질은 섬세해서 마치 점처럼 보인다. 그 환하게 빛나는 식탁보와 꽃병에 눈이 부신다.
3기 아를 시기 1888 ~ 1889
파리를 떠나 아를에 머무르는 고흐의 그림에는 노란 태양이 캔버스 가득 햇살을 내뿜는다. 해바라기를 7점 그리고 유화를 187점이나 그렸다니 고흐야 말로 양으로 승부 보는 화가였다. 어쩌면 자신의 삶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고 더 미친 듯이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아슬아슬하게 불안정한 정신을 부여잡고 끊임없이 붓을 놀리는 고흐가 보이는 것만 같다. 그런데 어째서 아를 시기의 태양은 저리도 밝고 밀밭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일까? 나는 문득 우디엘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가 떠오른다. 길펜더가 돌아간 파리는 1920년 대지만 나는 1888년 여름 아를로 가보고 싶다. 그 태양아래 작은 캔버스에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초라한 남자를 본다면 그 형형한 눈빛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엉뚱한 상상을 하며 생레미로 넘어간다. 결국 그는 고갱이 아니더라도 정신병원으로 가고 말았을 것이다.
4기 생레미 시기 1889~ 1890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아름다운 시기다. 전시회 팸플릿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고흐는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자연의 빛과 형태를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양식으로 발전시킴으로써 회화를 통한 구원의 길로 접어든 시기이다.' 전시회에는 없었지만 그토록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시기다. 생레미에서 고흐의 붓질은 더욱 격정적이고 '슬픔에 잠긴 노인' 속에서 고흐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는 궁금하다. 고흐가 정말 구원받은 걸까?
5기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 1890
고흐는 지쳐 있는 것 같았다. 더는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70일간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 생활은 끝났다. 그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서 황량한 마음을 드러낸다. 마지막까지 76점의 그림을 그린 이곳에서 고흐는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고흐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고 여생에 그릴 그림을 모두 그리고 떠난 것만 같다.
어둑한 전시실을 빠져나오자 환한 빛 속에 초록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나무들이 보인다. 5월이다. 내 발걸음은 대전 시립미술관과 접해있는 이응노 미술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