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에게서 택배 상자를 받았다. 상자에는 검은콩과 검은 땅콩이 지퍼백에 포장되어 있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써서 농사를 짓건 퇴비만 섞어 농사를 짓건 곡물상에 넘길 때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지인은 퇴비만 쓰고 농약 없이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거둔 것 중 알이 굵은 것은 팔고 남은 것은 겨우내 손으로 까고 손질해 그걸 택배로 보내 준 것이다.
지인이 보내준 땅콩을 윤기 나게 조리고 콩을 밥에 넣어 먹으면서 나는 옛날 생각을 했다. 결혼 초 기싸움을 하던 우리 부부는 찬밥을 가지고 실랑이를 했다.
시어머니는 요즘 젊은것들은 밥을 보온밥솥에 며칠씩 두고 먹는다며 남편에게 찬밥을 먹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남편은 내가 밥을 두고 먹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인 줄도 모르고 찬밥을 먹지 않겠다는 소리부터 했다.
그게 섭섭했던 나는 조금이라도 밥이 남으면 보란 듯이 버렸다. 남편이 먹지 않는 찬밥은 나도 먹을 수 없다는 일종의 시위였다.
이웃집 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언니가 고개를 저으며 “나는 우리 시부모님이 어떻게 농사지으시는지 알기 때문에 쌀 한 톨 그냥 버릴 수 없어”라고 말했다. 철없던 나는 누구는 버리고 싶어 버리는 줄 아느냐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땅콩을 바닥에 떨어트리면 냉큼 주워 먹는다. 검은콩으로 조림을 해서 자취하는 딸아이에게 싸주면서도 버리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우리 밥상에 올라온 밥이며 반찬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거쳐 그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나는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수고는 돈으로 내가 이미 대가를 치른 것이고, 버리는 건 손해를 감수하면 그뿐이지 누구의 수고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인이 검은콩을 키우며 겪은 수고로운 과정을 알게 되자 내가 안다고 생각한 것이 오만이었음을 깨달았다. 검은콩 옆에 있는 쌀도 그 못지않은 수고를 통해 내 식탁까지 온 것들일 테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운 이야기인데 그걸 이제야 알았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정말 안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일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인의 검은콩이 귀하면 누군가가 농사지은 쌀도 귀하다. 세상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는 없지만 내가 맺은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면 그 마음은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알게 한다. 지인은 콩을 보내주었는데 나는 귀한 깨달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