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의 계획, 예상치 못한 발견들
“구겐하임은 역시 미술관이기 전에 라이트가 남기고 싶었던 기념비인거지. 뉴욕 5번가의 정방형 빌딩가에 그 저층의 둥근 건물을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놓아보고 싶었던 것 같아. 나선형으로 내려가는 것을 포함해서 형태의 충격을 의식하지 않았을 리는 없어.”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김춘미 옮김
내가 MBTI를 별로 믿지 않으면서도, 남들이 나를 J라고 말할 때 역시 P임을 부정할 수 없는 건, 가끔 오로지 책 속 문장 때문에 여행 계획을 바꾸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랑스러운 INFP여!
구겐하임 미술관 방문을 결심한 건 독서 팟캐스트 '책걸상'에서 소개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책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름, 뉴욕이라니. 정방형 빌딩 숲에서 둥근 건물을 찾아내는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싶어 어떤 사전 조사도 하지 않았다. 무계획의 계획이랄까.
한 것이라곤 미술관 입장 예약과 주변 마트 검색뿐. 아이들에게는 "계단이 없는 미술관"이라는 스포일러만 던져두었다. 현재 전시가 뭔지, 상설 작품이 뭔지도 모른 채 맨해튼 어퍼 이스트의 사각 건물들 사이로 걸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이리저리 걷다 보니 저 멀리 둥근 건물이 보인다. 느낌이 왔다. 사진을 찍으려 멈추는 순간, 소 2가 짜증스럽게 외친다.
"엄마, 너무 더워! 지금 사진이 중요해? 빨리 들어가자!"
망설이는 사이 소 1이 벌써 미술관 문을 열고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터져 나온 나의 탄성. 소설 속 주인공이 처음 구겐하임 미술관에 갔을 때 나선형으로 내려오는 바닥에 수평면이 전혀 없다고, 그래서 걷다가 약간 현기증이 나고 속이 울렁거린다고 했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아직 시작 전부터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바깥의 열기와 상반된 차가운 미술관 공기 때문이었는지, 사각형 빌딩가를 통과하다가 원형의 공간에 들어온 탓인지, 나선형을 따라 움직이는 전광판 글씨 때문이지, 소 1, 소 2가 계단 없다고 했는데 저기 계단이 있다고 말한 탓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입장권 확인 후, 한 번 나가면 재입장이 안 된다는 말을 잘 알아듣고, 맨 꼭대기층부터 봐야 하는 룰 확인도 한 번에 알아들었다. 다만,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무조건 배낭 가방은 맡겨야 한다는 것은 못 알아들어서 미술관 경비원님에게 가벼운 제지. 소 1의 찌릿한 눈빛.
소 1은 팩트 체크를 위해 계단이 없는 미술관이라는 나의 스포를 확인했고, 비상용 계단이 있음을 보고했다. 소 2는 나선형 통로가 뭐가 신기하냐고? 항의했고, 전시 중인 작품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철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더불어 소 2는 각 층마다 있는 식수대에서 입으로 물 마시기에 꽂혀 버렸다. 미술관에서 식수대 찾아 물 마시기에 꽂히다니. 휴~.
2024년 여름의 뜨거운 뉴욕, 미술관 바깥 어디선가는 대선 선거운동으로 뜨거웠고, 반쯤 삭제된 문서 기록들이 다양한 재료로 다시 재현되고 부서져 하나의 예술품으로 등장했다. 내가 제니 홀저 아티스트 이름을 메모하며 심취해 있는 동안, 소 2는 식수대를, 소 1은 놀랍게도 삭제된 기밀문서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었다.
뜻밖에 구겐하임에서 앙리 루소의 그림을 마주하고 손뼉 치는 나를 아이들은 늘 그랬듯 말린다.
"조용히 해, 흥분하지 마, 엄마."
어떤 미술관에 가도 작품을 볼 수 있는 다작의 피카소는 식상하다며 소 2가 가볍게 지나친다. 소 2의 손에 끌려가듯 지나칠 뻔했지만, 뜻밖에 나는 구겐하임에서 본 피카소 작품이 소박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미술관을 나올 때에도 소 2는 여전히 식수대 이야기였지만, 소 1이 불쑥 던진 질문에 놀랐다.
"왜 문서마다 중간이 삭제됐어?"
“그건 말이지~”
설명하려는 순간 소 1은 이미 동생과 가위바위보 중이었다.
아 이 엇갈림. 그래도 다 들었겠지?
12살 인터뷰:
- 처음 구겐하임 건물 봤을 때 뭐가 생각났어?
:건물 모양이 꼬여 있어서 달팽이 같이 생겼었다.
(나는 이제 안다. 소 1이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다 보고 있다는 것을. 그걸 여행이 다 끝나고 알게 됐지만.)
- 나선형 통로 걸으면서 어떤 느낌이었어?
:통로 중간중간에 그림들이 있어서 걸으며 감상하니 좋았다.
(정말 보긴 본 거라는 걸 이제는 믿어.)
- 다른 미술관이랑 뭐가 제일 달랐어?
:나선형 통로, 미국치고 생각보다 작품 수가 적다. 트럼프 군사기밀 작품들이 신기했다.
(음, 넌 대단한 아이였어. 군사기밀은 아니고 정부 내..... 아니야.)
7살 인터뷰:
- 구겐하임 미술관 근처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안 난다고 했잖아? 이 동네 분위기 좋았어?
: 응, 좀 아늑했어. 근데 여기가 숙소였으면 좋겠어.
(음, 나도 그래. 나도 이 동네가 숙소였으면 좋았을 것 같아. 근데… 너무 비쌌….)
- 경사진 길 걸을 때 재미있었어?
:힘들었어.
(그래, 넌 항상 힘들었지. 그래도 식수대는 정말 잘 찾더라.)
- 입으로 물 마신 것만 재밌었던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그림은 없었어?
: 물은 너무 재미있었고, 기억에 남는 그림은 없었어.
(이제 엄마도 알겠어. 너는 식수대는 신기하고 유럽 그림들에는 관심이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