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에서 모노폴리까지
로망의 어원을 찾아본다.
프랑스어 'Roman'-소설, 이야기를 뜻하는 단어. 중세에 라틴어가 아닌 로망스어로 쓴 이야기였다가, 메이지 유신 때 일본에서 'ロマン'(로만/로망)으로 변신. '낭만적인 것', '이상적인 것'이란 뜻을 입고 우리나라까지 건너왔다. 아마도 'ロマンチック'(로맨틱)이란 단어의 영향이리라. (구글, 네이버 국어사전, 챗gpt 검색으로 종합)
그러니 내가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과 뉴욕 3부작을 거쳐 센트럴 파크 로망에 이른 건 우연이 아니다. 달의 궁전 속 주인공 포그가 웨스트 112번가에서 상속받은 수천 권의 책을 읽다가, 돈이 떨어지면 책을 팔고, 더는 팔 책이 없어지자 센트럴 파크에서 노숙. 그래서 나의 센트럴 파크 로망은 ‘소설’과 ‘동경’과 ‘낭만’이 함께 숨 쉬는 경험이어야 했다.
피크닉 돗자리, 과일 도시락, 갓 구운 닭요리, 음료수를 챙기고 싱잉볼과 소설책까지 넣어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7월 말, 구겐하임 관람이 길어진 탓에 오후의 공원은 끓어오르고 있었고 그늘은 마치 신기루처럼 자꾸만 멀어졌다.
드디어 찾아낸 넓은 그늘. 돗자리를 펴고 닭요리를 세팅하는 순간, 인생샷을 건지려 카메라를 들어 올리는 그 찰나, 어디선가 폭풍처럼 달려온 개 한 마리가 우리의 평화로운 피크닉을 덮쳤다.
닭고기를 지키려 온몸으로 음식을 감싸 안은 나와 달리, 소 1, 소 2는 처음 보는 대형견의 위용에 멀찍이 물러나 "Oh my God!"을 연발할 뿐이었다. 뒤늦게 달려온 개 주인(나시 운동복에 레깅스 차림, 손에는 아이폰을 쥔 채 한낮의 러닝을 즐기는 진정한 뉴요커- 이 뜨거운 한낮에도 러닝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이 장문의 사과를 늘어놓았지만(그런 것 같았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건 'Sorry' 뿐.
우리는 어색한 미소와 "That's okay"로 응답하며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렇게 해가 정수리 정점에 이르러 햇볕에 머리카락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포기를 모르는 나는 다시 센트럴 파크에서 로망 실현을 위한 장소 탐색에 나섰다.
(놀랍게도 그늘에 가면 정수리가 시원해지는 고온건조의 날씨. 아니면 정신력의 힘이었을까? 그늘만 가면 시원했던 이유가?)
갑자기 야친자(야구에 미친 자) 소 1이 눈을 반짝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해외 미아 찾기의 악몽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소 1이 멈춘 곳은 센트럴 파크의 사회인 야구장. 한낮의 열기 속에서도 풀세팅 야구복을 입은 각양각색의 야구인들이 경기 중이었다. 소 1은 홀린 듯 야구를, 소 2는 개 습격의 트라우마를 달래 줄 다이어트 콜라를 찾았다.
오른쪽 어깨는 짐 가방으로, 왼손은 대충 접은 돗자리로 무장하고 얼굴은 땀범벅, 티셔츠 등짝은 축축해졌지만, 이 정도 시련으로 내 로망이 무너질 순 없었다.
두 번째 잔디밭. 야구공이 날아올 때마다 먼지바람이 이는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폈다. 차곡차곡 샌드위치와 과일 도시락을 꺼내려는 순간, 소 1, 소 2가 어디서 챙겼는지도 모를 모노폴리 보드게임을 돗자리 한가운데 펼쳐놓았다. 모노폴리라니. 노노. 잠깐만. 우리 피크닉다운 세팅을 해보자. "엄마 노노. 우리 모노폴리 일인자가 누군지 결판내야 해."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센트럴 파크를 만났다. 아이들은 다이어트 콜라와 과자를 먹으며 맨해튼 한복판의 초록 심장에서 부동산 임대놀이에 빠져들었고, 나는 14시간 비행에 수하물 무게 이슈를 뚫고 가져온 네팔 직구 싱잉볼을 꺼냈다. 집에서는 맑고 청아하게 울리던 소리가 드넓은 공원에서는 더 깊고 멀리 퍼지겠지 싶었는데... 영상으로 담기니 뭔가 김이 샌 느낌이라는 게 함정.
부동산 게임에 점점 몰입해 가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살짝 쪼그라든 싱잉볼 로망을 접고 소설책을 펼쳤다. '센트럴 파크 그늘 아래서 책 읽는 나'란 낭만에 취하려는 순간, 소 2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아.... 나는 왜 완벽한 J가 아닌가. 우리나라처럼 시야 안에 화장실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급한 상황에 센트럴 파크 어디에 화장실이 있는지 갑자기 머리가 하얘졌다. 이럴 땐 무조건 물어보기. 그런데 여기도 우리처럼 관광객뿐.
울기 직전인 소 2를 달래며 급하게 검색한 화장실은 뛰어도 10분 넘게 걸리는 거리. 다행히 이정표 덕에 헤매지 않고 옷에 실례하기 직전에 도착. 이제 문제는 돗자리로 돌아가기. 아... 거기가 어디였더라. 구글 라이브뷰만으로는 방금 전 우리가 있던 자리를 어떻게 찾지?
흠흠. 이럴 줄 알고 소 1 핸드폰 위치추적을 해둔 나의 선견지명. 20분 만에 이뤄낸 가족 상봉. 내 걱정과는 달리 소 1은 느긋하게 폰게임 중이었다.
센트럴 파크에서 싱잉볼 명상하고 책 읽는 나의 낭만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낮잠이나 자야지 누웠는데, 이번엔 시간대별로 해가 움직여 그늘 방향이 바뀐 게 아닌가. 잠들만하면 발이 뜨거워서 돗자리 위치를 바꾸고, 다시 잠들만하면 또 발이 뜨겁고...
"에이씨. 얘들아. 우리 집에 가자." 하니까 이번엔 소 1이 화장실이 급하단다. 소 2는 화장실이 멀어서 가기 싫다고 한다. 소 2만 돗자리에 두고 갈 수도 없고 실랑이하는데, 소 1이 혼자 다녀오겠단다.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이 소 2가 뭐라 하는 2개의 오디오가 동시에 섞여 들어와 뇌가 혼미해진 상태에서 소 1은 화장실을 찾아가버렸다. 흠흠. 나에겐 위치 추적 앱이 있으니 소 1이 파란 점으로 움직이는 걸 확인하며, 소 2 말에 의식의 흐름대로 대답하는 멀티 엄마 포지션.
무사히 소 1이 돗자리로 돌아오고, 나는 짐을 챙기며 생각했다. 로망은 로망일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짐을 들고 지하철역 입구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 한참을 걷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잠깐 걸음을 멈췄다. 아마도 버스킹 중인 듯한 음악소리. 그렇지만 아주 잠깐. 이 순간이 무척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됐다. 이거면 됐구나. 이상. 끝.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센트럴파크 피크닉이 이리도 생동감(?)있다니요~^^당혹스러운 순간들을 연속으로 마주하면서 마틸이 힘들었겠다 싶으면서도 그래 이런게 여행이지라는 생각도 드네요~ 아이둘 데리고 집 앞 마트만 가도 이유없이 힘들잖아요. 뉴욕까지 날아가서 도시락과 싱잉볼까지 챙겨 소풍을 다녀온 마틸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망은 깨지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저도 얼른 로망 깨러 나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