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어와 보트,스튜디오,그림 속의 조명,자화상 속 화가, 진주 귀걸이
“미술관에 여자들은 벌거벗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가?”라는 문장을 소 1이 기억하고 있다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여행 이야기를 하다가 소 1이 이 문장을 말했을 때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솔직히, 아이들에게 미술관은 "엄마 로망 이루기"를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해설사 선생님 설명이나 그림에 대해 애써 이야기해 주려는 내 말에는 1도 관심이 없었는 줄 알았는데.
전시실 벤치에 자리가 있을 때마다 서로 앉겠다고 소 1, 소 2의 눈치게임을 보면서 한숨 푹푹 그랬었는데.
나도 잊고 있던 해설사 선생님의 말을 문장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니.
역시 아이들은 내 예상을 빗나간다.
마찬가지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역시 모든 면에서 내 예상을 빗나갔다.
나는 메트의 첫 방문 때 해설사 선생님과 첫 만남에서 우리를 향해 해주시던 주의사항 중에 인상적인 말을 기억해 냈다.
“ 메트의 예술품들은 인류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 보호해야 합니다.”
그 뒤에 플래시나 영상촬영에 대한 주의 사항, 관람선 지키기 등등의 주의사항이 이어졌지만, 나는 ‘인류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문장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브링리의 에세이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에도 소개된 <델라웨어를 건너는 워싱턴> 그림을 초반에 본 것. 이 그림에 관한 글에는 브릴리가 경비원이던 시절에는 건물 보수중이라서 전시 불가 상태였다. 그 전시실의 마호가니 목재에 관해 알려주던 테렌스라는 경비원 동료가 한 말에 나는 밑줄을 그었다.
“테렌스는 자신이 아마도 카리브 연안으로 납치되어 온 마지막 아프리카인들의 후손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전시실을 나가면 윈슬리 호머의 <더 걸프 스트림>이라는 작품을 보았다. 해설사 선생님이 조지 워싱턴 그림 다음에 총총총 걸어가시면서 아주 잠깐 언급하며 지나갔다. 그런데 나는 엄마 오리 꽁지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두 번째 볼 때 꼭 다시 보겠다는 마음이 생긴 이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 문득, 갑자기, 그림 속에서 흑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 1은 해설사 선생님 옆에 딱 붙어 있고, 소 2는 엄마 오리 꽁지를 놓칠까 봐 내 손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그러고 나서 다시 뒤뚱뒤뚱-미련 많은 발걸음으로 전시실을 오갔다. 두 번째로 만난 캐리 제임스 마샬의 그림 속 흑인들. 내 발걸음을 잡은 것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림 옆에 붙어 있는 작은 해설판에 그의 출생지가 적혀 있는 것이었다. American, born Birming ham, Alabama, 1995. 현대 다른 작가들 그림에도 이렇게 출생지가 적혀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던가? 마샬이라는 작가에게 출생지를 적는 게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엉켰다.
다시 한번 소 2의 다급한 잡아당김에 이끌려, 이번에는 유럽 고전주의 화가 엘 그레코 그림 앞에 섰다. 그전까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그림을 보다가, 엘 그레코 그림 앞에서는 입이 떡 벌어지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과 감탄이 탄성으로 쏟아졌다.
‘대단하다’라는 말 말고 ‘최고, 대박’ 뭐 이런 말 밖에 못 하는 내 어휘력에 비참함을 느끼며, 피카소가 역시 엘 그레코 그림 <성 요한의 계시>를 보고 <아비뇽의 처녀들>을 구상한 것이라는 해설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메모했다.
르네상스 이후 그림이 밝고 사실적이고 아름다운 그림들과 엘 그레코 그림은 확연히 달랐다. 극적이고, 그림 속에 조명이 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단 한 점 내가 갖고 싶은 그림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고민 없이 엘 그레코의 <목자들의 예배>를 고를 것이다.
소 1과 소 2는 3시간 가까이 진행된 회화 투어에 점점 지쳐가는 것 같았다. 전시실을 옮길 때마다 서로 먼저 벤치를 발견하는 사람 내기 같은 걸 하지 않나, 해설사 선생님 보다 훨씬 앞에 가서 이리저리 휙휙 고개를 돌리며 사람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60대 램브란트 자화상 앞에서 진지하게 그림을 들여다보는 소 1!
엄마, 저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린 사람이 화가 아냐? 하면서 베이메르 그림을 한 방에 알아본 소 2.
우리는 그렇게 혼란과 감탄과 발견이라는 뜻밖의 경험으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기억하게 되었다.
12살 소 1 인터뷰
1. "메트로폴리탄에서 본 그림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뭐야? 왜 그 작품이 특별했어?"
:램브란트, 60세 자화상, 그림이 굉장히 사실적이었고, 가이드 선생님의 설명도 기억에 남아서
2. "'벌거벗은 여인들의 방'에 대한 가이드 선생님 설명 들었잖아. 남자 화가들의 그림이 90%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어?"
: 좀 차별이 있었고, 여자들의 그림도 더 많이 들어오면 좋겠다.
(이후, 소 1은 메트가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 궁금해하며 유튜브를 찾아보더라는...)
3. "미술관이 이렇게 큰걸 보고 놀랐을 텐데, 한국의 미술관과 비교하면 어떤 점이 달랐어?"
: 미국이 땅도 크고 작품도 많아서 그런지 엄청 스케일이 컸다.
(의외로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아서 신기한 엄마)
7살 소 2 인터뷰
1. "처음에는 무서워했는데, 나중에는 진지하게 그림을 봤더라. 어떤 그림이 제일 재미있었어?"
: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림, 그냥 내 스타일.
2. "미술관에서 본 그림들 중에 집에 걸어두고 싶은 그림이 있었어? 왜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어?"
: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림.
(이유는. 쓰지 않는다.)
3. "미술관이 엄청 컸지? 걸어 다니는 게 힘들진 않았어? 중간에 쉬고 싶었던 적 있었어?"
:엄청 쉬고 싶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