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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Oct 11. 2024

숙취가 있을 걸 알면서도 술을 마신다는 건

숙취가 있을 걸 알면서도 술잔을 기울인다. 체질상 맞지 않아 거진 끊다시피 했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한 건 올해 사월 무렵이었다. 다 떠나가는 상실. 견디지 못해 술을 따랐다. 술에 취하면 한결 괜찮을 줄 알았다. 취하면 잊지 못할 것들도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너무 오래간만에 술을 마신 탓일까. 평소 주량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꼴깍 꼴깍 마셨다.


술을 잘못 배운 까닭에 무조건적으로 원샷이다. 가득 채워진 소주잔이 단숨에 비워진다. 비워지지 않는 건 내 마음뿐이다. 사람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나만 헝클어졌다. 시각은 열한시를 넘겼다. 그리고 그다음 또 술을 먹게 되었을 적에도 열한시를 지나쳤다. 엄마의 연락이 부재중으로 쌓였다. 비틀비틀하는 나를 붙잡는 손길들이 마냥 따스했다.


다음날 신기했던 점은 체질상 맞지 않아 기피하던 술이 아무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단 것이다. 본래 한두 잔만 마셔도 새벽 내내 식은땀을 흘리며 앓아야 했던 터라 한 육 년? 칠 년간은, 기껏해야 일 년에 두 번 정도 술을 마셨던 것인데. 멀쩡하다는 게 신기했다. 엉망이 된 머리칼을 긁적였다. 멋쩍었다. 나름 아플 걸 감수하겠다며 호기롭게 마신 거였다.


꼴에 기분을 내겠다며 해장을 한다. 새롭게 알게 된 건 내게 해장으로 햄버거가 아주아주 잘 맞는단 점이었다. 소연 언니가 맥모닝을 사와 나눠 먹으며 알아챘다. 메스껍던 속이 진정되었다.


최근 술을 마시며 들었던 생각으로는 술이 분위기 전환에 굉장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술을 마시기 전과 후의 공기 흐름부터 달라진다. 서먹했던 공간이 부드러워지고 친근해진다. 물론 역효과가 일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만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말이다.


사람들은 기쁜 일에 술을 마실 때도 있다. 무언가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술을 마시기도 한다. 반대로 슬플 때 마시기도 한다. 슬프거나 화나거나 할 때 술을 마신다. 기쁠 땐 기억하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슬프거나 화가 날 땐 잊기 위해서 마신다. 감정이 두 배가 되게 하는 쪽, 혹은 감정을 누그러뜨리도록 하는 쪽.


그런데 술이 무언가를 잊게 하는 데에 진짜 효과가 있나? 술을 마시는 순간에는 그랬던 것도 같다. 사람들과 흥이 돋아 떠들썩하다 보면 잠깐은 그랬다. 다만 문제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발생했다. 잠자코 숨어있던 감정이란 녀석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더더욱 요동친다. 난장판을 만든다.


전봇대 옆에 주저앉아 많이도 울었다. 방안 침대에 누워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 보내지 말았어야 할 메시지를 보내고 다음날 이불 차며 후회했다. 전날 취하여 저질렀던 행동을 후회하는 일 또한 숙취의 일환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람은 왜 간혹 실수할 걸 알면서 조절하지 않은 채 술을 마실까? 어쩌면 실수를 하기 위해 술의 힘을 빌리는 걸 테다. 예를 들어 보내지 않았어야 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하여, 걸지 않아야 할 전화를 걸고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을 쏟아내기 위하여, 취했단 핑계로 구차해지기 위하여.


어떤 이는 나에 대해 알고 싶어서 같이 술잔을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어떤 이는 단순히 재미를 느끼고파 술을 마셔주기를 원한다. 어떤 이는 헝클어지지 말라며 제지한다. 술잔을 빼앗고 술병을 가져간다.


솔직히 난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체질상 안 맞아 거부하는 겸 맛이 없어서 싫었다. 그리고 현재 다음날 숙취로 하루를 날릴 수도 있단 무시무시함에 싫다. 피부가 뒤집어지는 점도 별로다. 헝클어지는 모습도 매우 별로다.


그런데도 내가 술을 마시고 싶단 말을 하는 건 진짜 진짜 슬프거나 힘이 들 때이다.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가진 언어이다. 술 마시고 싶다, 하면 얘 지금 힘들구나, 누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기분이 나아질 정도로만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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