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질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존재한다. 이 사람이 내게 어떠한 커다란 위로라든가 관심과 정성을 쏟아주진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하게 슬퍼지거나 우울의 절정을 달리고 있을 때 불현듯 떠올라 더욱 그리움이 사무치는 것이다. 이런 날이면 작고 희미한 주황 불빛 조명 하나에 의지한 채 침대에 벌러덩 누워 하염없이 상념에 잠긴다. 어둑한 분위기의 방안이 내 감성과 퍽 잘 어울려 심적 안정감을 안겨준다. 빙글, 몸을 돌려 낮은 간이 책상 위 널브러져 있는 책 한 권을 손에 든다. 밑줄 그은 문장들을 다시금 읽어본다. ‘존재만으로 사랑할 수 있는데 그런데 왜 소유하는 것부터 배울까.’ 되뇌다가 덮어둔다.
눈이 나빠진단 야단에도 형광등 불빛은 도무지 내 취향이 아니라며 한사코 스위치를 누르지 않고서 고집을 부린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시력이 더욱 떨어지고 있는 참이다. 최근엔 난시 판정을 받기도 했다. 모든 사물과 사람의 이목구비가 번져 보이는 것.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만 나쁘지 않다. 살면서 굳이 굳이 선명하여 좋을 건 그다지 없었다. 아니 여태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도 사물도 풍경도 글자도 뿌옇고 흐려질수록 내겐 되려 낭만이었다. 그래서 시력이 0.1이나 안경을 잘 들고 다니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경계가 모호하다.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영화관에 가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이젠 반대로 또렷하고 선명하여 자명해질 경우 내겐 너무 큰 자극으로 다가와 불편해질 듯하다. 전반적인 삶 자체가 흐리멍덩하다.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도 찡그리지 않으면 명확히 분간해 내기 어려울 지경으로.
사람은 왜 사람 때문에 약해진 날에도 사람을 떠올려내는가? 사람에게 상처받고선 사람을 찾아가 데인 곳을 어루만져 달라며 낑낑거리는가? 어떤 때는 집에 있음에도 집에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바깥에서 특정한 인물을 만났을 시 그곳이 곧 집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수차례 골몰한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간격을 둔다고 가정했을 때 왜 몇몇은 불만과 서운함을 품고 몇몇은 만족감과 안정감을 느끼는 걸까?
저마다 침범 받고 싶지 않은 일정한 공간이 있다고 한다. 이를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 즉 개인 공간이라고 한다는데, 이를테면 낯선 사람이 가득한 공간. 버스나 지하철에서 한 칸씩 띄운 채 띄엄띄엄 앉는 것과 엘리베이터 안에서 옹기종기 붙어 서있기보다는 적정 거리를 확보하여 모서리, 꼭짓점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 어떠한 주장에 따르자면 각자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상대와 가까워질 시 부담감을 느끼게 되어 거리를 두게 된다. 건강한 인간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상대의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한데 간혹가다 그 이상을 침범하고 요구하고서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잘못된 사람’ 취급을 하기도 한다. 여간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나 역시 그러한 적이 잦았다. 과거 경험을 토대로 사람과의 간격을 더 벌려둔 면이 없잖아 있긴 하다. 다만 진심이 아녔다고 부정당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과 거리가 비례한단 의견에 동의할 수는 있으나 자신에 대하여 남김없이 공개하여야 한단 면에선 다소 동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한동안은 날 안다는 게 슬프게 여겨질 적이 있었다. 하나 점차 시간이 흐르고서 깨달은 건 날 안다는 건 타인에게 날 해할 무기를 쥐여주는 꼴처럼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랬다. 나를 알 경우 나를 아프게 했다. 처음엔 그러지 않았다. 영원인 양 손을 꽉 쥐었다. 그러다가 손톱을 세워 생채기를 내는 건 눈 깜짝할 사이, 방심한 틈을 타서였다. 그렇기에 경계해야 했다. 나를 알려주지 않고 누군가를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아야 했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 말 중에 사람은 소유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따끔한 일침이 있었다. 난 누군가를 굉장히 사랑하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자 했다. 작은 일에도 크게 반응하여 불같은 질투를 했고 그로 인해 다 타버리는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는 이전부터 이러한 날 알고 일러준 거일 수도 있겠다. 한참이 지나와 이해가 되는 말로 인해 나는 그때 알았어야 더 잘 살 수 있었을 것 같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배움이 있는 거일 테니까.
안경을 바로 쓰지 않아 변함없이 흐리멍덩하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간판의 글씨는 알듯 말듯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 간격도 그런 게 아닐까? 알듯 말듯 할 때 알고 싶어지고 너무 많은 걸 알려줘버렸나, 불안하지 않고서.
그러나 이 모든 걸 뛰어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걸 여전히 알려주고픈 이들과 알려주기 바쁜 이들이 존재한다. 난 이들이 오랜 시간 내 경계를 허물기 위해 노력해 줬단 점을 인지하고 있다. 나의 안식처. 이리저리 치이고 지쳐 전부를 포기하고 싶었을 적에도 돌아가고 싶은 것은 당신들 곁이었다고, 고백하고자 한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데었다. 다른 유형의 사람들도 아녔던 거 같다. 성향이 달라 상처를 주었다고 하기엔 너무 무책임한 방관인 것 같다. 지난날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성큼 다가오는 이를 기피한다. 여러 무리는 가급적 피한다. 이게 나를 지키기 위한 공간이야, 선을 긋고 그 앞에 쪼그려 앉는다. 그러하면 다수는 콧방귀를 뀌며 뒤돌아가고 소수는 남아 같은 자세를 취하곤 말없이 손만 내밀어 준다. 언제든 네가 잡고 싶을 때 잡으란 의미이다. 네게 준비할 시간을 줄게. 나를 존중한다.
난 이들의 반듯한 다정에 시간이 조금 걸릴지라도 끝내 마음의 문을 연다. 이들은 내게 동그라미다. 잔뜩 모난 세모나 네모 축에 끼는 나와 달리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동그라미. 난 동그란 이들 품에 산다. 운이 좋다. 이들에게 보답하고자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흐리멍덩한 것들 사이에서 이들의 진심은 가장 선명하다.
나쁘지 않다. 약해져도 죽진 않을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