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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Oct 13. 2024

일본에서도 사랑 타령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건

멀리 와서도 네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비행기에 탑승하고서 벨트를 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메모장에 위와 같은 문장을 적은 것이었다. 그리고 말마따나 오사카로 떠나온 이박 삼일 내내 하나의 존재가 머릿속 위를 배회했다. 문장에 힘이 있나. 계획을 세우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는 편에 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행자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쪽이었다. 미룬다고 하기엔 뭐 했다. 안 해 버릇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만 ‘계획’이란 말만 들어도 스트레스가 잇따랐다. 물론 그렇다 하여도 상대에게 의지만 하는 건 이기적인 심보일 수도 있겠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가는 채원이 계획을 세웠다. 그녀의 공책 위 수기로 쓰인 장소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만들었다. 군말은 없었다. 불평불만도 없었다. 고분고분 잘 따르는 사람이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딱히 좋고 싫음이 분명하지 않아서인듯하다. 채원의 손에 이끌려 맛집에 가고 쇼핑을 하며 구경을 했다. 체력이 좋지 않은 나를 배려한 채원의 여유 있는 계획이었다. 맛집은 가는 곳마다 웨이팅 줄이 길었다. 첫날 첫 번째로 가려던 오코노미야키 가게엔 끝내 가지 못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일본어와 일본어로 쓰인 간판이 신기했다. 관광으로 유명한 터라 대부분 메뉴판에도 한국어가 쓰여 있었다. 한 오 년 전이었나. 그때 방문했던 도쿄와는 다르게 조금 더 한국과 비슷한 면이 다분했다. 현재 도쿄는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말이다. 우리는 흔히들 필수 코스로 간다던 유니버설 스튜디오도 가지 않았다. 아쉽지 않았다.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기에 이런 류의 한적한 거리를 걷는 게 좀 더 내 취향과 맞아떨어졌다. 채원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잰걸음으로 걸었다.


지난날 일본어 공부를 하여 일본에 살겠단 결심은 지워버린 지 오래이다. 당시 그래야겠단 까닭이 있었는데 사라져버린 이유였다. 한순간에 식었다. 시시해졌고 일본어 공부를 하고자 했던 책을 닫아버렸다. 다시 펼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막상 일본에 오게 되니 이곳에 눌러 살고픈 마음이 드는 건 희한했다. 편의점 음식을 먹고 규카츠를 먹었으며 다코야키와 고기, 라멘 등을 먹었다. 도톤보리 강에서 사진을 찍는 채원을 카메라로 담았다. 곁에 온 외국인이 핸드메이드 팔찌를 사라며 부추기는 탓에 흐름이 깨져버렸지만 말이다.


중간중간 사진을 찍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내겐 채원의 추억을 예쁘게 남겨줄 실력은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 카메라 장비를 잘 둔 덕분이었다만, 여하튼 그랬다. 우메다 공중정원에서 바라본 노을은 사람을 말랑해지게 돋우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난간에 달라붙어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찌 보면 작은 지구인데 나라가 나뉘어 있고 다양한 언어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일본어로 대화를 하며 걸어가는 일본인 커플을 보며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 와서도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단 게 신기했다. 어느 나라든 사랑이 있단 게. 다른 언어로도 사랑을 말할 수 있단 게.


이렇게 멀리 와서도 사랑 타령이었다. 비록 비행기로 두 시간 채 되지 않는 거리이다만 더 멀리 가서도 난 사랑을 얘기하고 있겠구나, 했다. 대관람차를 타면서도 그랬다.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만약 여기서 잘못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어김없이 누구의 번호를 누르고 있을지 상상했다. 장소 불문하고서 사랑 없인 시체와 다름없다.


채원에게는 이번 여행을 통해 하지 않았던 말을 하기도 했다. 정말 몇몇만 알고 있는 나의 옛이야기를 펼쳐놓았다. 채원은 덤덤하게 들었다. 잘 구워진 고기를 내 앞접시에 얹어주었다. 난 이런 채원의 따스함이 좋았다. 전에도 내가 사랑 때문에 펑펑 울던 시절. 사람 때문에 엉엉 울던 시절. 그리고 이번 자칫 지독한 트라우마가 될 뻔했던 과거 경험의 이야기까지.


채원은 한결같이 덤덤한 태도로 듣고서 행동으로 위로했다. 예를 들어 내가 가지고 싶다던 이모티콘을 뜬금없이 선물해 준다거나 먹을 걸 사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채원의 위로 방식은 백 마디의 어떠한 말보다 무게가 있었다. 무심한 척하면서도 행동에서 묻어 나오는 다정은 무시할 수 없었다. 말랑해지고 뭉클해지기 일쑤였다. 다정함에 기대어 좀 더 시무룩하게 투정 부리고 싶어졌다.


여행 마지막 날. 채원과 편의점에서 산 치킨 두 조각과 피자 호빵, 과자들을 펼쳐놓고서 소감을 전했다. 채원은 내가 군말 없이 따라오는 건 좋았다만 너무 군말이 없었다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럴 수 있었겠다. 내가 이 여행에서 한 것이 없는 점은 사실이었다. 반성하고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뒤로는 웃고 떠들다가 밤이 늦어서야 잠에 들었다.


멀리 와서도 네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핸드폰에 적어둔 문장을 소리 없이 읽었다. 꿈에도 비추지 않는 얼굴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한창 노느라 바빠야 할 여행에서 줄기차게 따라붙는 얼굴이 있단 게 난생처음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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