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을 잡고 이 현실로부터 도망가주세요

by 주또

그냥 당신이랑 한적한 곳에 가서 길게 눈 맞추고 싶어요. 그 누구한테도 쉽사리 못 꺼낸 속사정 같은 거 털어놓으며 말이에요. 난 사실 당신이랑 단순히 오랜 친구이고 싶기도 했는데요. 그래야만 꼭 이별이 없을 듯해서요. 하여간 당신이랑 도피라고나 할까요. 왠지 여행보다는 이러한 표현이 훨씬 더 낭만 있어 보이긴 하네요. 당신이 또 낭만이라면 껌뻑 죽고 그러잖아요.


당신과 현실도피나 홀가분하게 떠나서, 우선 밥을 차려먹은 뒤 설거지를 하고 낮잠을 자고 싶어요. 그러다가 느지막한 오후쯤 일어나 동네 슈퍼마켓에 가는 거예요. 그곳에서 군것질거리를 왕창 사서 돌아오는 거죠. 그 사이 아이스크림 두 개를 오물거리고.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허벅지에 스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고. 이외로는 풀벌레 우는소리, 바람 부는 소리, 개울 물결치는 소리 같은 게 들려오면 좋겠군요.


당신이랑은 불필요한 말이 필요하지 않을 거 같아요. 왜, 침묵이 어색해서 괜히 하는 실없는 대화들 말이에요. 이를테면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주제. 오늘 뭐 했는데, 어제는 뭐하려고 했는데, 이런 거.


평소에는 눈치 봐가며 행동해야 할게 너무너무 많아요. 말이라든가 행동이라든가. 심지어는 표정조차 나 편하자고 짓는 게 없어요. 쓸데없이 남들 장단 맞추고 비위 맞추는 데에 감정을 할애해야 하고요. 어쩔 땐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듯하기도 해요. 사방에 CCTV가 깔린 것 마냥 그래요. 내가 뭘 잘못하나. 틀리는 거 아니려나. 한 소리 하고자 벼르고 있는 존재들처럼 여겨지고 그래요. 그래서 이 현실 속에선 경계하며 스스로에게 엄격해져야 하거든요.


그러나 당신 앞에선 말이 달라요. 무장해제되어요. 마음껏 방심하고 흐트러져도 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여요. 이게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요. 고로 나는 무지무지 힘든 시기에는 당신과 하릴없이 거닐고 싶어요. 공기 맑은 곳에서 아이스크림이나 까먹으며 나란히 어려지는 상상을 해요. 주변엔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요. 우리를 괴롭히는 방해꾼들만 전부 사라진 상태예요.


아.

이곳에 나를 버려두고서

당신이랑 그곳으로 가 살면 진짜 좋을 것 같네요.


내가 도망쳐야 할 것들 틈에,

당신만 속하지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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