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꾸준히 글쓰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요즘 부쩍 막힌다. ‘이거다’ 싶은 화두가 떠오르지 않는다. 부담을 버리려고 아무렇게나 쓰다 보면 연결고리가 없고. 그러면 지속이 어렵다. 책을 목표로 글 쓰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인다. 개중에는 이상한 책도 있지만, 뭐가 됐든 한 권, 두 권, 또 몇 권씩 쓰는 사람들은 다 대단하다.
소설을 써 보고 싶은 적도 있다. 꿈을 기가 막히게 꾸다 깨면 뻑뻑한 눈을 비비며 다 적어 놓곤 한다. 누구나 한 번쯤 ‘이거, 완전 영환데?’ 하는 꿈을 꾸지 않나.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이따금 있었고, 소설로 쓰고 싶은 이야기를 두어 개 추려 뒀다. 언제가 될지, 가능하기는 할지 아직 모른다.
언제인가 '이런 심오한 꿈을 꾸다니!'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는데, 그로부터 몇 년 후 어느 유명한 소설가의 신간을 읽고 깜짝 놀랐다. 부분적으로 비슷한 게 아니라 도입부 설정이 거의 똑같기 때문에 나중에 내 것을 좀 바꿔 쓰더라도 표절 시비에 휘말릴 것만 같다. 어딘가 꿈 제작소가 있어서 같은 꿈을 몇 명에게 배포했는데 하필 그중 한 명이 유명한 소설가인 바람에 나는 기회를 잃은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면 이제 ‘꿈 제작소’에 관한 공상을 시작한다.
공상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주로 밤에 그런 일이 잦으므로 어떨 때는 미리 알람을 맞춘다. 최소한 몇 시간은 자야 하니 딱 알람 울릴 때까지만 공상하자고 다짐한다. 공상은 왜 나를 그토록 집중하게 할까.
요즘은 집중이 귀하다. 누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예요?”라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집중’이라 답하고 싶다. 하긴, 틈틈이 하고 있기는 하다. 이번에 셀프인테리어를 하면서 벽지를 과감히 벗겨내고 페인트벽을 만드는 작업을 했는데, 벽에 퍼티 바를 때나 샌딩할 때, 페인트칠할 때도 꽤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창작을 향한 집중. 이번 셀프인테리어 작업은 내게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이제 환경 바꾸기에 이어 내면 매만지기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졌나 보다.
창작이라고 부를만한 활동을 오랫동안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슬럼프일지도. 내가 바라는 것은 대단한 작품활동이 아니라 낙서 한 장, 노래 한 소절인데 그 작은 일을 못 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자기 개발서가 시중에 많길래 오늘은 그중 하나를 골라 읽었다. 그러면서 또 실행을 유예하고.
공상 속의 내 모습에, 나는 한 발짝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을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탈인 건 아닐까.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그림도 그리고 싶고, 글까지 쓰고 싶은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실행하지 않을 핑계가 바닥날 때쯤, 세상은 귀신같이 그걸 알고 새로운 문제를 안겨준다. 돈줄을 끊어 조급하게 만들거나, 인간관계를 비틀어 고달프게 만들거나. 이런 일 한두 번인가 하며 이겨내려고 하면, 이번에는 병을 줘서 몸과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도 한다. 방법은 다양하다. 그 모든 방해 공작들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글만 써도 책 한 권은 나오지 않을까. 아니, 그 모두를 극복하는 법을 써야 비로소 자기 개발서가 될 수 있으려나?
근래의 가장 괄목할 만한 핑곗거리는 바로 구직활동이었다. 올 초 상황이 여의찮아 일을 관뒀는데, 여름에 동거인과 함께 집을 사고 말았다. 그러면서 모아 둔 현금의 대부분을 써 버린 나는, 늦어도 가을부터는 일정한 수입원을 마련하자고 마음먹었다. 잔고가 줄어든다는 긴박함과 재취업이 쉽지 않은 나이 장벽, 게다가 건강검진에서 발견된 만성위염까지, 완벽했다.
하지만 창작을 안 했다고는 할 수 없다. 지원하려는 포지션에 맞게 핵심역량 추출하기, 불필요한 내용은 걷어내고 선택적인 사실만 강조하기, 내 안에 남은 긍정을 리본 삼아 보기 좋게 포장하기. 일종의 창작이다. 거짓은 없지만, 이리저리 편집된 진실. 이 일을 몇 주 동안 하니 출근하기도 전에 번아웃이 올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곧 재정이 안정되면 다시 창작에 집중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있다. 오늘 읽은 자기 개발서에 따르면, 내가 못났거나 의지가 약해서 미루는 게 아니라고 한다. 단지 뇌의 현상 유지 본능 때문이라고.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거스르기 쉬울 리가 없다.
작은 소망 하나는 새로운 직장이 내 정신세계를 과도하게 점유하지 말았으면 하는 점이다. 안 그래도 이제는 체력 저하가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정신력까지 일터에서 소진할 수는 없어. 아차, 쓰고 보니 운동도 시급하구나.
이 글은 본격적인 직장생활을 시작하기 전 하루 한 문장이라도 쓰는 습관을 들이려 적는 글이다. 마치 매일 하는 일과인 것처럼 뇌를 길들여서 나중에 세상이 또 어떤 방해 공작을 펼칠지라도 아무렇지 않게 글을 쓰고 있으면 좋겠다.
Se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