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
나는 울음을 좋아한다. 가끔은 울 거리를 찾고 울 방법 또는 울음을 대신할 방법을 찾기도 한다. 사정 상 울기 어려울 때는 웃는 것도 괜찮은 대체제라서 때로는 과하게 웃는다. 내가 이렇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한 적도 있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나는 이렇게 태어난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나는 슬픔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울음의 기쁨을 즐긴다. 울음만큼 기쁜 것은 내게 없다.
한동안은 너무 오래 우울에 시달려 우울증이 되었다. 하지만 우울증은 내 ‘울음사랑’과는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언제고 울 수 있는 상태는 내게 있어 감정의 표면층이 무척 유동적이고 화사한 상태를 의미한다. 가령 코미디를 보면서도 울 수 있고, 벽에 떨어진 햇살을 보고도 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느 쉽지 않은 일들로(세부사항은 누락하겠지만), 그 연쇄적인 일들로 인해 몇 년 간 내 감정은 질서와 균형을 잃어갔다. 이런 상태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 자주 번거로웠기 때문에 감정을 숨기거나 아예 굳히려는 노력을 했다. 시멘트 굳히듯. 그러다 원래의 나와 억지로 될 수 없는 나 사이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게 되자 내 안은 굳은 회색 덩어리가 되었다. 그렇게 어찌해도 가뿐히 울 수 없는 상태에 직면했고, 그게 내가 정의하는 나의 우울증이다.
이 우울증으로 몇 년 전 인생 첫 심리상담을 받았고, 그로부터 2년 후 두 번째 상담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그때 일이다. 서너 번째 방문이었을까, 당시 매일 하고 있던 일 한 가지를 선생님에게 얘기했다. 바로 해빗트래킹이다. 스프레드 시트의 맨 윗줄에 카테고리로 나눈 할 일 리스트를 기입하고 그 아래로 한 달치 날짜를 차례로 적어 매일 체크하는 일이었다. 생산적인 구석이라고는 1도 없는 삶을 견디기 어려워 시작한 일종의 숙제였다. 목표가 과분하면 오히려 좌절감만 커질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시트에는 일부러 아주 사소한 일을 적었다. 예를 들면 하루 한 번 스트레칭하기, 일주일에 한 번 일기 쓰기, 한 달에 한 번 영화 보기, 그런 것들.
그전 몇 회차의 세션에서 내 어려운 상황과 무기력감에 대한 얘기만 나눠서 그런지 선생님은 시트 얘기도 그중 하나라 생각하셨다. 작은 일에도 필요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고 매일의 일상마저도 강박증세로 나타나는 것 같다는 의견을 주신 걸 보면. 아뿔싸. 속으로는 ‘그게 아닌데’ 싶었다. 시트는 내게 있어 유일하게 유의미한 행위였다. 빈칸에 체크하기 위한 목적 하나로 정말 그 일들을 하고 있었으니 주객이 전도돼 보인대도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아무리 우울해도 나는 본래 이렇게 꼼꼼하고, 나아지기 위해 이런 노력까지 한다는 걸 인정받고 싶어 꺼낸 얘기였을까. 그런데 칭찬은커녕 걱정스러운 눈빛을 돌려받아 당황했지만, 그 자리에서는 그냥 ‘끄덕끄덕’ 했다.
어쩌면 선생님은 내가 하지 말라면 더 하는 청개구리임을 간파하고 일부러 그렇게 반응하신 걸까. “그렇게까지 관리하다니 대단해요” 같은 말을 해 주었다면 비뚤어진 나는 그날부로 시트에 흥미를 잃고 그마저도 내팽개쳤을지 모르니까. 그분의 의도야 어찌 됐건 그때 시작한 해빗트래킹은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지속되며 진화했다. 안 하기가 더 어려운 작은 목표에서부터 조금씩 하고 싶은 일도 포함하는 쪽으로. 단순한 ‘v’ 표시에서 아이디어나 정보를 메모해 두기도 하는 쪽으로.
처음에는 무엇이든 최소한의 형태로라도 다시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일상도 망했고, 일도 망했고, 관계도 망쳤고, 좋아했던 음악활동도 망쳤고. 이제 다 망했는데 뭘 해야 하지. 아니, 뭘 할 수 있지. 그런 상태였다. 아직 망하지 않은 것들은 일부러라도 다 망쳐서 끝내던 때였다. 모두 부수고 싶었다. 어떻게 잘 봐주려고 해도 이전에 살던 ‘삶’의 모습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실제로 한동안은 죽었다 생각하고 지냈다. 나는 이미 죽었고, 지금 내가 보내는 시간은 모든 게 끝난 뒤의 벌 같은 거라고. 잠들 수 없고, 일어날 수 없고, 인사할 수 없고, 더 이상 기뻐서 웃을 수 없는 벌이라고.
그렇게 두어 해를 보내는데 갑자기 아까웠다. 몇 년 전 첫 상담도 달라지고 싶어 받아 놓고는 결국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어쩌면 더 최악으로 흘려버린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우울증에 당하는 동안 낭비될 대로 낭비되었을, 누가 따로 마일리지라도 적립했다가 나에게 돌려줄 리도 없는 내 감정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 아무리 벌이라도 이렇게 지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래서 만든 시트였다. 다시 내 시간을 내가 쓰고, 내 감정을 내가 쓰는 ‘삶’을 이루고 싶어 만든.
해빗트래킹은 누군가에게는 강박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게 나에게는 지극히 이완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그 누군가는 믿어 줄까. 단단한 회색 덩어리를 비집고 들어간 유일한 도구. 단지 작은 칸들을 채워 넣으며 동시에 머릿속은 비우는 행위에 몰입했기 때문일 수도, 뭐든 매일 할 일이 생겼다는 사실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런 방법이 모든 성격에게 먹히는 건 아니겠으나 나에게는 꽤 괜찮은 우울감 개선 툴이었다. 물론 꾸준한 상담과 약 복용에 더해진 보조적 수단으로써 말이다.
혹시라도 이 방법을 써 보고자 하는 분을 위해 몇 가지 팁을 적어 본다. 첫째, 평소 정돈된 표나 빈칸 채우기, 정렬, 계획적이거나 체계적인 것을 좋아하는 성향에 적합할 것 같다(내가 그렇기 때문인데 혹시 그것과 상관없는 거라면 알려 주시기 바람). 둘째,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칭찬하려는 목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셋째,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면 하찮은 일부터, 즉, 안 하기 더 어려운 레벨부터 하는 것이 좋다. 넷째, 위의 팁을 다 적용했는데도 의욕이 없을 때는 자책하지 말고 ‘양치’ 같은 것이라 생각해도 괜찮다. 즐거워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거야, 정도로 가볍게 말이다. 실제 칫솔에 치약을 짜며 든 생각이라 이렇게 적었는데, 이 분야에 더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도 집는 포인트일 듯하다.
다행히 현재 나는 다시 가뿐히 울 수 있는 상태고, 올해 최고의 울음은 극장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며 끅끅댔던 울음이다. 그런 울음이라면 언제든지 환영. 다만 몇 년 전에 비해 전체적인 감정의 화사함이 조금 줄어든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소실이 아닌 성숙이기를 바라고 있다.
Se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