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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서 기차표 미루며

프롤로그

by 세상 사람


이 글은 전주에서 쓰고 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한옥마을 도서관에 앉아서.


밖에는 가을비가 내리고, 전통 문살 디자인을 살린 유리창 너머로 비에 젖은 기와지붕과 녹엽이 내다보인다. 평일이라 그런지, 아니면 주말에도 이곳은 이렇게 한적한지. 직원 한 분과 드문드문 오가는 이용객 한둘을 제외하면 너른 열람실이 나의 독차지가 됐다. 이런 호사라니.


마루로 된 통로를 따라 걸으며 서가를 훑은 나는, 기다란 원목 테이블과 꽃을 수놓은 광목 방석이 깔린 좌식 열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즈넉한 이곳 전경과 대조적으로 마음은 잠시 바빴다. 서울로 돌아가는 열차 시각을 미뤄야 했거든.


들어오자마자 알았다. 짧게 있다 갈 곳이 아니군. 원래 여기는 슬쩍 둘러만 보고 전주역으로 가야 하는 스케줄이었다. 계획대로 하기를 좋아하는 나지만, 오늘은 다른 내가 필요했다. 1,300원의 반환 수수료를 치르고 느긋하게 떠날 수 있도록 밤 기차로 바꿨다. 내일의 피로는 내일의 내 몫.


애초에 빠듯할 거라고는 상상 못 한 탓이다. 3박 4일이면 꽤 넉넉하고, 오늘로 예상했던 용무가 취소되면서 오히려 차편을 앞당기게 될 줄 알았는데. 마지막 날에 와서야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나 깨닫는다. 일주일도 길지 않았을 듯하다.


오기 전을 떠올리면 더 한심하다. 여차하면 안 올 뻔했으니까. 이래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문제가 된다. 한참 여행 계획 세우다가도 갑자기 무의미의 계곡으로 훅 떨어져서는, 전주는 가서 무얼 하나, 관광도 별로 안 내키는데, 설레지가 않아, 이러면서 미루던 내가 있다.


마지막으로 혼자 떠난 여행이 거의 10년 전이니, 내가 이 ‘혼자 여행’을 좋아하는지 어쩌는지도 잊은 채 살았다고 해야 맞다. 그 기억은 다 한때일 뿐, 추억용 열람마저 뜸해져 있었다. 게다가 스마트폰이며 소셜미디어로 너무 많은 정보에 노출되면서 간접 경험에 조금 체했다고 할까. 귀찮아져 버렸다고 할까. 소파에 앉아 엄지손가락만 움직이며 빠져드는 허무주의의 늪은 무서운 것이었다.


그 늪이 마냥 편안했다면 한옥마을 도서관 마룻바닥은 못 밟았겠지. 마루 위에서 낮잠 자다가 모르는 척 일어나 그루밍하는 삼색 고양이도 못 만났을 테고. 아쉬워하면서 ‘이번 전주 여행에서 못 가 본 곳’ 리스트를 구글 시트에 정리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다행이네. 소파에 자꾸 뿌리내리려는 나를 캐내 전주행 기차에 올려놓아서. 집에 돌아가면 조금 긴 글을 이어 써 보고 싶다. 이번 여행에 큰 원동력이 되어 준 나의 클럽 활동 얘기 말이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내가 처음 만든 [글쓰기 모임]에 대한 것이다.


Seine



사진은 전주 한옥마을 도서관에서 만난 삼색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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