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시 눈을 뜬 한별은 핸드폰 알람을 끄고 별자리 운세 앱을 눌렀다. 딱히 별자리 운세를 믿는 건 아니었으나 학창시절부터 이어진 습관이었다.
'윤한별. 오늘 별자리 운세는 뭐야?'
심심찮은 놀림들. 이름에 별이 들어가서 어린 시절부터 유치한 장난을 받았다. 매번 점성술사인 척하며 얼토당토 않는 운세를 말해주기도 했다.
하루는 생일을 맞아 별자리 운세를 직접 찾아봤다. 그저 심심풀이였다. 다칠 수 있으니 몸 조심하라는 뻔한 내용이었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오던 그날 저녁, 보기 좋게 넘어져 한동안 팔목에 깁스를 하고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아침마다 별자리 운세를 확인하는 습관은 그날 이후 생겼다. 별자리 운세는 안 맞는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꾸준히 아침마다 찾았다.
[20**년 8월 **일 오늘의 별자리 운세 - 천칭자리]
난관이 있더라도 낙담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 하는 하루입니다. 어려운 일 사이에서 당신의 잠재된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날이겠습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있다면 자신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세요. 조금 더 자신을 믿고 선한 마음을 잃지 마세요. 당신의 따뜻한 마음이 주변으로 널리 퍼져 새로운 기회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 얻을 선물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하루가 고단하다는 것은 별로였고, 그 끝에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나름 괜찮았다. 별자리 운세는 믿고 싶은 말만 믿으면 된다.
"하루가 좋을지 나쁠지는 겪어봐야 알겠지."
한별은 핸드폰 화면을 끄고 침대에서 옆으로 굴러 바닥에 다리를 내리고 일어섰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태프로 일한지도 다섯달 째였다. 군 제대 후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북미와 남미 여행을 다녀온 일도 이미 까마득했다.
여행을 다녀온 뒤 복학을 미루고 용미포로 향했다. 바다가 있어서 좋았고, 삼촌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가 있어서 편했다. 놀러온 조카에게 삼촌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기를 권유했다. 스페인어와 중국어를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며. 한별이 여행 전후로 스페인어를 배웠고, 중국어를 전공했으니 딱 맞는 인재라는 의견이었다.
삼촌은 서로에게 도움되는 조합이라고 했지만 알고 있었다. 삼촌의 게스트하우스에 외국인이 찾아오는 일은 드물다는 것을. 그때만해도 용미포는 내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였고,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찾아오는 여행지였다.
처음에는 게스트하우스 일도 수월했으나 용미포항에서 드라마를 촬영한 다음부터 점점 사람이 늘어나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늘 빈방이 있었던 게스트하우스에도 예약이 꽉 찬 날들이 많았다. 심지어 10월과 11월 예약을 미리 잡아둔 손님들도 있었다.
조용히 쉬기 좋다고 소문났던 용미포의 여름은 전보다 들썩이고 있었다. 아직은 작은 동네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만 방문했다. 한별은 앞으로도 이 정도의 사람만 오기를 바랐다. 오버투어리즘은 지역 주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피곤한 일이다.
최근에는 서핑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핑이 유행이라더니 나름 대중성있게 자리잡은 듯했다. 한별도 SNS에 서핑 보드를 세워두고 찍은 사진을 꽤 올렸다. 물 위에서 일어나 겨우 파도를 타고 가는 수준이지만 이준이 찍어준 사진만 보면 그럴싸했다.
"복장 괜찮고."
흰 반바지에 푸른색 반팔 셔츠를 갖춰 입은 한별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고 방을 나섰다.
"오늘은 어디 놀러가?"
리셉션에 서있던 재현이 밝은 얼굴로 한별을 반겼다. 재현은 벌써 1년째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하고 있었다. 일처리가 꼼꼼한데다 성실하고 성격도 수더분한 스태프 선배였다. 삼촌은 입버릇처럼 재현을 게스트 하우스 후계자로 칭했다.
"후계자님. 밤새 안녕하셨는지요."
한별이 장난스레 허리를 숙였다. 재현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흰 머리를 단정히 고정한 회장님 같은 반응이었다.
"용미산 둘레길 갔다가 진서 누나네 일하러 가려고."
"옛집? 누나가 거의 완성됐다고 하던데?"
진서도 얼마전까지 게스트 하우스에 묵었기에 재현도 상황을 얼추 알고 있었다.
"텃밭 만든다고 도와달래. 형, 텃밭 만들어 봤어?"
"아니. 이래봬도 손에 흙 한 번 안 묻혀본 사람인데."
"누나가 알겠지? 삼촌은 아직 주무시죠?"
재현이 응, 하고 답하며 울리는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고생해요, 형."
한별은 손을 들어 인사를 전하고, 에코백을 어깨에 둘러맸다.
한별이 옛집에 도착한 건 다섯 시 반 쯤이었다. 한 여름보다 해가 짧아진 걸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처서가 지난 여름. 오후의 바람에는 초가을의 기운이 은은하게 담겨 있었다.
"누나! 와서 밭 가는 거 도와달라더니, 어디가 밭이에요? 그냥 땅인데?"
한별이 뒷뜰을 살폈다. 진서가 텃밭으로 조성하려는 뒷마당의 한 켠은 아직 밭의 형태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잡초를 뽑아 놓은 부분이 곧 밭으로 변할 곳이라 짐작할 정도였다.
"왔어?"
진서는 작업 방석에서 일어나 뻐근한 몸을 폈다. 진서가 어기적거리며 한별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엉덩이에 매달린 작업 의자가 씰룩거렸다.
"오늘따라 네가 더 잘생겨 보인다. 구원자가 따로 없네."
"근육통이에요? 잡초를 얼마나 뽑았길래?"
진서가 팔을 쭉 뻗었다. 손가락 끝이 한 곳을 향하자 한별의 시선이 뒤따랐다. 담장과 텃밭 사이의 빈 공간에 진서가 뽑아 던져둔 잡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진서는 호미를 내려두고 작업 방석을 벗었다. 허벅지가 뻐근해서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밀집모자를 벗으며 다리를 쭉 뻗은 진서가 한별을 올려다 보았다. 한별이 다리를 굽혀 진서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인건비 비싼 거 알죠?"
한별이 바닥에 놓인 새 장갑을 흔들어 보였다. 장갑을 낀 한별은 옆에 놓인 농기구를 흥미롭게 살폈다.
"이건 삽인 거 알겠고, 호미도 알겠고. 나머지는 뭐예요?"
"괭이랑 쇠스랑."
"이게 괭이구나.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건데요?"
"파. 두더지처럼. 곳곳을 갈아 엎어."
"그냥 무작정 파면 돼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한별은 한쪽 장갑을 벗어 스마트폰을 뒤적였다. 괭이질 하는 방법, 텃밭 만드는 방법 같은 영상을 찾아 빠르게 돌려봤다.
"딱 기다려요. 여기부터 저기까지 쫙 갈아 놓아 줄게요."
일머리가 있는 편인 한별은 제법 그럴싸하게 땅을 뒤집기 시작했다. 힘들지도 않은지 괭이질을 하면서도 한별의 입은 쉴 새 없이 진서를 웃겼다. 덕분에 다소 지쳤던 진서는 쉬면서 기운을 차렸다.
텃밭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진서의 걸음으로 쟀을 때 가로로 여섯 걸음, 세로로 다섯 걸음. 하지만 초보자들이 일하기에는 넓은 밭이었다. 비료와 거름을 섞은 흙에 이랑과 고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웠다. 비닐의 끝부분을 흙에 묻은 진서가 삐걱거리며 일어났다. 작업 방석에 앉아 쭈그려있던 다리가 저릿했다.
"마당에 잔디 절대 안 깔아. 텃밭이랑 꽃밭만으로도 충분해. 다 돌로 덮어버릴 거야."
진서가 선 채로 다리를 주물렀다.
"잔디 관리 엄청 힘들대요. 보기에는 예뻐도."
한별도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다리를 풀었다.
"그러니까. 잔디 포기. 텃밭은 비닐까지 씌웠더니 제법 그럴싸하지?"
"탁월한 호흡이었어요. 뭐 심을 거예요?"
"배추, 상추, 깻잎, 대파. 그리고 쪽파랑 무."
진서가 늘어선 모종을 차례대로 손으로 가리켰다. 모종 옆에는 쪽파종구와 무씨가 담긴 봉투도 있었다.
끝날듯 끝나지 않는 작업은 계속 이어졌다. 담장과 가까운 첫번째 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배추 모종을 심었다. 한별이 비닐 덮인 이랑을 호미로 파두면, 진서가 모종을 심는 식이었다.
중간줄에는 반은 무를 심고, 나머지 반은 쪽파를 심기로 했다.
"이게 무 씨가 맞나?"
무씨를 손바닥에 올려둔 진서가 갸우뚱했다. 무씨는 번쩍이는 청록색 옷을 입고 있었다.
호미로 구멍을 파던 한별이 진서의 반응을 보더니 다가왔다.
"깡통로봇 같은데. 먹을 수 있는 거 맞아요?"
한별의 눈에도 무씨가 씨앗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준이 머리를 맞대고 씨앗을 관찰하는 두 사람을 줌인했다.
"일단 심자. 구멍 하나에 다섯 개씩 넣으랬어."
"다섯 개? 너무 많이 넣는 거 아니에요?"
"나도 몰라. 그냥 종묘상에서 들은대로 하려고. 망하면 망하는대로 두지, 뭐. 일단 심고 보자. 으하하."
진서가 씨앗을 구멍에 흘려 넣었다. 고동색 흙 위에 살포시 올라앉은 무씨는 청록색인 덕분에 눈에 확 띄었다. 진서는 다섯 개의 무 씨를 흙으로 잘 덮어 다독였다.
나머지 반쪽 이랑에 쪽파종구를 심고 마지막 이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가면서 손 뻗기가 쉬운 마지막 이랑에는 상추, 깻잎, 대파 모종을 차례대로 심었다.
모종을 다 심은 뒤, 진서는 호스의 손잡이를 조절해 물이 가늘게 나오도록 만들어 이랑마다 골고루 물을 뿌렸다. 마지막 이랑에 물을 주고, 물 세기를 조절해 한별에게 호스를 내밀었다. 한별은 손에 묻은 흙을 씻어내고, 가볍게 세수까지 한 뒤 호스를 받아 들었다. 진서도 노동의 흔적을 물줄기로 닦아냈다.
"아고고, 허리야."
한별이 호스를 내려두고 수그렸던 몸을 펴며 과장해서 허리를 두드렸다.
"고맙다, 윤한별. 덕분에 빨리 끝났어."
진서도 기지개를 켰다. 자그마한 밭이지만 쭈그려 다녔더니 근육마다 뻐근했다.
"힘들기는 해도 뿌듯하네요. 해놓고 나니까."
한별은 작물이 심긴 텃밭을 한눈에 담았다. 흙 속에 숨어 있는 무씨나 쪽파 종구, 아직은 자그마한 모종들이 언제 클까 싶었다.
"내년에는 참깨랑 들깨도 심어야지. 복자 할머니가 참기름이랑 들기름은 직접 짜서 먹어야 맛있대. 고추도 심으라고 하셨는데."
"얘네 아직 싹도 안 났는데 벌써 내년 농사 지을 거 생각해요?"
"너무 빠르지? 일단 가까운 것부터 생각해야겠다. 11월쯤에 김장에 도전할거야."
한별이 기겁하여 진서를 돌아보았다.
"김장? 김장이요? 이거 김장하려고 심었어요? 어째 분위기가 두려운데. 아닐거야, 설마."
"설마, 맞아. 김장할 때도 와주세요. 미리 감사합니다."
"완전히 당했네."
한별이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고, 진서가 와하하 웃었다.
"안녕하세요."
지우가 뒤뜰로 와 인사를 건넸다. 아직 쭈뼛거리기는 했지만 전보다 밝은 모습이었다. 지우는 게스트 하우스에 갔다가 한 차례 인사를 나눈 적 있는 한별에게도 어색하나마 인사를 건넸다.
"시간 잘 맞춰 왔네. 할머니 병원은 잘 다녀왔어?"
"네, 큰 문제는 없으시대요. 저녁 식사 하시고 드라마 보고 계세요. 저는 언니 말대로 밥 안 먹고 왔어요."
"배고프지? 우리도 엄청 배고파. 빨리 밥 먹자.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옛집은 일할 때와는 다른 분위기로 들썩였다. 앞마당 한 켠에 자리한 화덕 위에 가마솥 뚜껑이 뒤집어 놓여 있었다.
"화덕은 언제 만들었어요?"
한별이 벽돌로 만든 화덕을 이리저리 살폈다.
"오늘 아침에. 이준씨가 도와줬어."
"오올~"
한별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이준을 향해 환호를 보냈다. 촬영 중인 이준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능 프로그램을 돌려 보면서 진서와 화덕을 만든 보람이 있었다.
"메뉴는 뭐예요?"
한별이 장작에 불을 붙이는 진서 옆에서 부채질을 했다.
"당연히 삼겹살."
"역시. 흙먼지는 기름기로 싹 내려줘야죠."
"그냥 먹고, 김치 같이 구워 먹고, 마지막은 볶음밥. 각종 쌈채소와 쌈장, 쌈무, 김가루랑 참기름도 준비했지."
"탁월한 메뉴 선택이십니다."
"네, 손님. 삼겹살은 무한 리필입니다. 이 정도면 일당으로 충분할까요?"
"예, 다음에도 불러 주십쇼~"
한별이 부채를 빠르게 펄럭이자 장작에 불길이 치솟았다.
화덕 옆에 빨간 포장마차 테이블이 차려지고, 의자 네 개가 둥그렇게 놓였다. 서로 도와가며 준비한 저녁 식탁이 푸짐했다.
"윤한별, 한 점 먹기 전에 보너스도 줄게."
냉장고에 넣어뒀던 삼겹살을 가져온 진서는 한 손을 뒷짐진 채였다. 지우는 스마트폰을 들어 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오, 뭔데요?"
테이블에 수저를 내려놓고 한별이 진서를 바라보았다. 진서는 등 뒤에 숨겨 두었던 손을 한별에게 내밀었다.
"화분?"
한별이 건네 받은 하얀 화분을 이리저리 살폈으나 흙만 가득했다.
"특별히 사온 흙과 화분이야. 씨앗은 방금 심었고."
"뭐 심었는데요?"
"비밀이야."
"아, 그런 거 완전 궁금한데? 못 참는데?"
"그래도 비밀. 물 줘야 돼."
진서가 컵에 생수를 담아 건넸다. 한별은 화분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진서가 전해준 컵을 기울여 조심스럽게 물을 줬다.
"화분에 귀 대봐."
"귀요?"
그냥 해보라는 진서의 눈짓에 한별은 의문을 가진 채 화분을 들어올려 귀를 댔다. 화분에서는 꼬륵꼬륵, 꾸르르, 하는 소리가 났다.
"어때? 흙이 물 먹는 소리가."
"소리가 날 줄은 몰랐어요. 근데 뭐를 심었을지가 더 궁금한데요? 진짜 안 알려줄거예요?"
한별이 장난치며 물었으나 진서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웃기만 했다.
"잠 자기는 틀렸네. 궁금해서."
한별은 화분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하얀 테두리를 손으로 쓸었다. 뭐를 심었을까, 어떻게 키워야 하는걸까. 궁금증이 늘어나고 있었다.
"나도 선물 하나 줄까요? 별자리 운세 봐줄게요. 누나 별자리 뭐예요?"
한별이 화분에 두었던 시선을 돌려 진서를 바라보았다.
"별자리 운세? 그런 것도 볼 줄 알아? 난 처녀자리."
"처녀자리? 생일이 언젠데요."
"8월 27일."
"27일? 이번주 토요일이 생일이네요?"
"응. 그날 옛집 리모델링 완성 축하파티 겸 내 생일파티 할거야. 거하게."
"용미포에서 파티는 처음인데? 기대하고 있을게요. 선물 뭐 줄까요?"
"오늘 줘."
진서는 고민 없이 환하게 웃었다.
"오늘요? 아무것도 없는데요?"
"가마솥 뚜껑을 네가 닦아 주겠니? 빡빡?"
"아, 누나!"
한별의 투정을 들으며 진서는 가마솥 뚜껑 위에 삼겹살을 올렸다. 치익, 고기 익는 향이 풍겼다.
"이거 해 보고 싶었어요."
한별이 진서가 들고 있던 집게와 가위를 가져갔다.
"엄청 금방 익는데요? 누나, 얼른 앉아요. 지우 누나도요."
한별이 진서가 올려둔 고기를 뒤집으며 재촉했다. 지우는 자리에 앉아 익어가는 삼겹살을 구경하며 입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진서는 자리에 앉아 이준에게 슬쩍 눈길을 줬다. 촬영중이던 이준과 눈이 마주치자 진서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먹을래요? 라는 물음이었다.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큼 걸어와 진서의 옆자리에 앉았다.
"뭐예요? 벌써 촬영 끝이에요?"
진서가 놀라서 물었다. 먹을 거냐고 물어본건데 카메라를 두고 자리에 앉다니. 지금까지 이준이 이런 적은 없었다. 역시 가마솥 뚜껑 삼겹살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니요. 아직 촬영중이예요."
"역시. 삼겹살은 못 참겠죠? 으하하."
"졌네요. 삼겹살에."
이준은 가까이서 들려오는 진서의 웃음소리에 미소 지었다. 오늘 밤은 한 화면 안에 담겨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좋네요."
이준의 차분한 음성이 옛집 마당에 불어오는 바다 향기에 섞였다. 진서와 이준의 눈빛이 테이블 사이에서 얽혔다.
삼겹살을 구경하던 지우가 집게를 흔드는 한별의 눈치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진서와 이준의 웃는 얼굴이 닮아 있었다. 한 사람은 으하하 웃고, 한 사람은 싱긋 미소만 지었음에도.
"지우 누나, 거기 접시 좀 주세요. 고기 다 익었어요."
지우가 퍼뜩 놀라 냉큼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지우가 든 접시 위에 고기를 잘라 놓으며 한별은 장난기가 솟았다.
"형 생일은요? 언제예요?"
"5월 3일."
이준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면 황소자린데. 오호~"
한별이 고기를 새로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뭐가 오호~야? 황소자리가 운세 좋아?"
진서가 한별을 쳐다봤다.
"그런 게 있어요. 일단 고기 먼저 먹어요. 이렇게 구워본 건 처음이지만 제대로 구웠을걸요? 맛 보세요."
한별은 처녀자리와 황소자리의 궁합이 꽤 좋다는 말을 숨겼다. 우선은 이준 형에게만 따로 말해 봐야지. 피식 웃음이 새어났다.
"화분에 뭐 심었는지 안 알려줘서 숨기는 거지?"
"생각 못 해봤는데, 그래 볼까요?"
"그렇다면 뇌물을 써야지. 골라. 소주? 맥주? 막걸리? 콜라?"
"전 소주로 가겠습니다."
"고기 굽느라 고생했으니 한별이 먼저."
진서가 한별과 이준에게 소주를 따라주고, 술을 못 한다는 지우에게는 콜라를 따라주었다. 이준은 진서가 고른 캔맥주를 따서 건넸다.
"고마워요, 이준씨. 그리고 지우랑 오늘 제일 고생한 한별이도. 텃밭의 작물들이 잘 자라기를 바라면서, 건배!"
네 개의 잔이 테이블 가운데서 경쾌하게 부딪쳤다. 시원하게 음료를 들이키고, 취향껏 고기를 한 점씩 안주로 삼았다. 진서는 상추에 깻잎을 올리고 밥, 고기, 쌈장, 마늘을 차례대로 쌓은 쌈을 한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었다.
"이 맛이지. 밖에서 구워 먹으면 입에 쫙쫙 붙어."
쌈을 꿀꺽 삼킨 진서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근데 용미포는 왜 용미포야?"
"몰라요."
진서의 물음에 이준과 한별이 동시에 답했고, 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삼겹살이나 먹자. 으하하. 아악! 벌레!"
진서가 진저리치며 팔을 털었지만 나방은 꼼짝 않고 반팔 소매에 붙어 있었다. 이준이 진서의 팔에 앉았던 나방을 무심히 손으로 잡아 멀리 날려 보냈다.
"와, 진짜 고마워요. 아니, 근데, 어떻게 그걸 그렇게 손으로 잡아요? 어우, 난 못해. 애벌레는 되도 다리 많이 달린 애들이랑 미친 듯 날아다니는 애들은 안 돼. 쟤네도 나를 싫어하겠지만, 어쩌면 무시하겠지만, 안 돼."
"거미는요?"
이준이 웃음을 띠며 물었다.
"거미 정도야 이제 거뜬 하죠."
진서가 어깨를 들썩했다.
여름 밤, 왁자지껄한 옛집에 은은한 파도 소리가 밀려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