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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성화 Aug 17. 2022

용미포 옛집

5. 페인트

책의 한 구절, 영화의 한 장면, 누군가의 한 마디가 삶을 바꿀 거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생각의 틀을 깨 준 건 영화 <숲 속의 식당>이었다. 숲 속 마을에서 작은 식당을 차려 잔잔한 일상을 살아가는 줄거리. 선호하는 장르는 아니었지만 당시 여자친구를 따라 본 영화였다.


 밋밋하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처음에는 다소 지루했지만 마지막에는 코끝이 찡했다. 식당에 온 손님들과 도란도란 사소한 일상을 나누는 장면도 물론 좋았지만 가족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아내와 아이들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 하는 장면. 꿈꾸던 미래의 모습이었다.


 슬프게도 영화를 함께 본 여자친구는 떠나갔지만 그때부터 홀린 듯 요리를 배웠다. 처음에는 혼자 가기 멋쩍어서 프랑스 친구인 라파엘을 꼬드겼다. 한국에 왔으면 한식을 체험해봐야 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라파엘은 곧장 흥미를 보이며 따라 나섰다.


 요리라고는 계란 후라이, 라면, 김치볶음밥 정도가 최선인 시절이었다. 접근이 쉬운 원데이 클래스부터 시작했다. 대부분이 외국인이던 한식 수업의 메뉴는 불고기였다.

직접 만들어 먹은 불고기는 신세계였다. 맛도 맛이지만 어렵고 복잡하게만 보였던 요리를 직접 해냈다는 성취감이 컸다. 차츰 자취방에 주방용품이 늘어갔고 냉장고에는 식재료가 채워졌다.


 몇 차례 원데이 수업을 들으며 요리에 익숙해진 뒤 야금야금 독학으로 배우다 요리학원에 등록했다. 남들이 취업 준비를 할 때 1년간 요리학원에 다니며 진로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미친짓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살면서 요리를 할 때만큼 설렌 적은 없었다. 식재료를 고르고, 취향따라 양념을 가감하고, 맛있는 냄새를 맡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휑하니 빈 어딘가가 구석구석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졸업을 하고 친한 선배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배웠다. 처음부터 식당을 운영할 목적이었기에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식당 여름 휴가 겸 단합대회로 만난 장소가 용미포였다. 선배의 형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에 묵으며 용미포에 반했다. <숲 속의 식당>의 바다 버전 식당을 만들고 싶었다.


 용미포에 정착한 지 이제 3년차다. 제철 음식을 이용하는 예약제 한식당이었지만 식당 이름은 파밀리에로 지었다. 가까운 사람, 단골이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인데 영화 속 식당 이름에서 빌려왔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일은 손에 익었지만 사람을 대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용미포에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덕에 접하는 군상도 가지각색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요리하는 일도 좋아해 문을 연 식당이지만 하루 건너 하루 만나는 진상 손님 때문에 요식업에 대한 회의감이 태풍처럼 몰아쳤다.


 지난주는 유난히 힘든 손님들이 많았다. 노쇼한 손님, 술취한 채 찾아와 소란을 피운 손님, 식기류를 훔쳐가다 발각된 손님도 있었다. 마지막 타격을 준 손님은 바로 어제, 일요일 마지막 손님이었다.


 "음식 별론데? 돈 내야하나?"


 손님은 비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서서 한쪽을 비뚜름히 올린 입꼬리로 히죽 웃었다. 농담이라기에는 불쾌했고, 진담이라기에는 그릇이 싹싹 비워져 있었다.


 이런 손님은 연우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이었다. 같이 온 사람에게 한껏 거드름 피우면서 이 재료는 어떻고, 저 재료는 어떻고, 이건 이래서 별로네, 저건 저래서 별로네 하는. 맞는 지적이라면 배워야하지만 대부분은 잘못된 내용이라 나서서 정정해 주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랬더니 식사의 마무리를 이렇게 하다니.


 평소 같으면 그냥 넘겼겠지만 유달리 힘들었던 한 주의 마지막 손님으로는 버거웠다. 목구멍까지 열불이 치솟았다. 겨우 짓고 있는 미소였지만 볼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인사는 했다. 인사를 마친 후 그대로 한참 서 있었다. 사실, 그 손님은 다시는 안 왔으면 했다.


 "잊어버려. 하루 이틀이야?"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연우가 양손바닥으로 머리를 번갈아 두드렸다. 깔끔하게 정리해둔 앞치마를 펼쳐 두르고, 손을 깨끗이 씻었다.


 월요일은 파밀리에의 휴일이자 요리 연구일이지만 오늘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 경험상 이런 날은 요리 개발보다 마음을 달래는 편이 나았다.


 아침 일찍 시장에서 사온 재료들을 꺼내 손질하기 시작했다. 분주히 손을 놀리는 연우의 표정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새참 왔습니다."


 외벽에 페인트 칠을 하던 진서와 지우가 연우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준은 앵글 안에 걸릴 것을 계산해 말을 꺼낸 연우를 보며 피식 웃었다. 몇 번 출연하더니 이제는 화면에 담길 모습까지 고려하는 듯 했다.


 "마침 출출했는데 타이밍 예술이네. 근데 오늘은 요리 개발하는 날 아니야? 새로운 요리 선보이려고? 우리가 첫 시식?"


 진서가 페인트 붓을 내려놓고 지우에게 그만 하라는 손짓을 했다. 지우도 주뼛거리며 장갑을 벗었다. 진서는 서둘러 접이식 포장마차 테이블을 펼쳤다.


 "새로운 음식은 아니고 보양식."


 연우가 테이블 위에 냄비와 김치전을 올리며 지우에게 시선을 줬다.


 "이분은 누구실까?"


 "아, 지우씨야. 처음 보겠구나. 인사해. 옆집 할머니 손녀. 지우씨, 인사해요. 여기는 대학 선배 지연우. 용미포항 가는 길에 파밀리에라고 식당 있는데, 거기 사장님."


 "반가워요, 지우씨."


 연우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안... 안녕하세요."


 연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자그마한 소리였다. 지우는 어색하게 팔을 뻗어 연우의 악수에 답했다. 두 사람의 손이 스친 건 찰나였다. 지우는 악수를 나눈 손으로 바지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연우는 어색하고 뻣뻣하게 구는 지우의 행동을 모른 척 넘겼다.


 "냄새 대박. 여긴 뭐가 들었죠, 선생님?"


 진서가 냄새를 흠뻑 들이키고는 눈을 초롱하게 빛냈다. 모처럼 만난 연우의 음식은 냄새부터 위장을 자극했다. 출출했던 뱃속에 요란스레 허기가 밀려왔다.


 "닭죽. 삼계탕으로 하려다가 뼈 바르려면 이래저래 번거로울 것 같아서. 훌훌 떠먹으면 되니까 요깃거리로 좋을거야."


 "센스 인정."


 진서가 연우에게 엄지 손가락을 척 들었다.


 "잠깐 있어봐. 내가 그릇이랑 수저 가져올게. 여러 개 구비해두길 잘했다니까. 어? 언니!"


 진서가 대문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당으로 들어선 세은이 손을 마주 들어보이며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왔다.


 "마침 잘 오셨어요. 연우 선배가 새참 해왔는데 같이 드실래요?"


 "일 안하고 먹기에는 찔리는데?"


 "에이. 드셔도 돼요. 드실거죠? 연우 선배 요리 잘해요."


 세은이 진서에게 살짝 웃어 보이고 연우에게 눈을 돌렸다.


 "파밀리에 사장님 맞으시죠? 진서씨한테 말씀 들었어요. 저도 합석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맛있게 드셔 주시면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연우가 부드럽게 응하자 세은이 가볍게 웃었다.


 "이건 떡인데 간식하라고 사왔어."


 세은이 진서에게 하얀색 쇼핑백을 내밀었다.


 "우와. 감사해요. 후식으로 먹어도 될까요?"


 "얼마든지."


 세은의 손에서 진서의 손으로 쇼핑백이 건너갔다.


 "이번에는 제가 부탁해야겠는데요."


 연우의 시선이 쇼핑백을 줄기차게 따라갔다. 세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연우를 돌아보았다.


 "이거 '이 봄날의 떡집' 떡 맞죠? 오늘 주문해야 세 달 후에 받을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맞아요. 요즘 하도 유명해져서 주문도 힘드네요. 내 동생이 그 동네 살아서 예전부터 찾던 집이거든요."


 연우의 호들갑에 진서가 쇼핑백에서 떡 상자를 꺼냈다.


 "저도 SNS로 봤어요. 먹으면 좋은 꿈이 이뤄지는 떡이랬나? 맞죠?"


 진서가 묻자 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잠시만 집에 다녀올게요."


 사람들의 대화를 듣던 지우가 급히 집으로 향했다. 진서가 지우를 붙드려고 팔을 들자 세은이 만류했다.


 "기다려 보기로 해요. 왜 그런지."


 세은의 눈빛이 따스했다. 진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지우를 지켜봐 줄 때였다.


 "알겠어요, 언니. 기다리는 동안 그릇이랑 이것저것 가져 올게요."


 옛집의 파란색 포장마차 식탁이 제법 호화롭게 채워졌다. 나중에 먹겠다는 이준의 닭죽을 덜어 두고, 네 개의 그릇에 닭죽이 소담히 담겼다. 식탁의 중앙에는 바삭하게 익은 김치전이 놓였다.


 "반찬 좀 가지고 왔어요."


 지우가 집에서 가져온 반찬을 식탁 위에 펼쳤다. 지우의 분주한 움직임을 보며 눈을 마주친 진서와 세은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지우가 가져온 반찬까지 놓여 한층 풍성해진 식탁에 둘러 앉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숟가락과 젓가락이 움직였다.


 "진짜 맛있다.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맛있어."


 "그게 네 장점이다, 공진서. 맛깔 나게 먹는 거. 음식 해 온 보람 있네."


 연우는 지난주의 피로가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세은과 지우도 연신 맛있다는 말을 하며 그릇을 비워가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일은 마음을 치유하기에 충분했다. 따뜻할 때 먹지 못하는 이준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연우는 흡족한 마음으로 지우가 가져온 고추장 매실 장아찌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에 착 감겼다.


 "지우씨, 이거, 어디서 났어요?"


 연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모처럼 호기심을 자극하는 맛이었다.


 "할머니가 담신 거예요."


 "그러니까, 복자할머니가 직접 담그신 거다. 이 매실장아찌는."


 연우가 고추장 매실 장아찌를 음미하며 감탄했다. 입을 오물거리는 표정이 진지했다. 이후로도 연우는 장아찌를 한 입 먹고 중얼거리고, 또 한 입 먹고 중얼거렸다.


 네? 하면서 되묻던 지우는 연우의 혼잣말이라는 걸 깨닫고 먹는데 집중했다. 찹쌀이 적당히 퍼진 닭죽은 담백했다. 닭죽을 삼키고 입안에 남은 감칠맛이 사라지기 전에 김치전을 조금 찢어 입에 넣었다. 오징어가 촉촉하게 익었고, 가장자리는 바삭한 김치전이 입에 착 감겼다.


 "혹시 고추장도 할머니가 직접 담그셨어요?"


 "네? 아, 네."


 갑작스런 연우의 질문에 지우가 음미하던 김치전을 꿀꺽 삼켰다. 콜록거리는 지우에게 연우는 물컵을 건넸다.


 "뭔가 있어, 이 맛에는. 손맛인가? 요리 배우고 싶은데 할머니 만나뵐 수 있을까요?"


 "할머니...요? 지금은 마을 회관에..."


 "그러면 말이라도 전해 드리면 안 될까요? 고추장 담그는 법이랑 매실 장아찌 담그는 법 배우고 싶다고. 제발, 부탁드린다고."


 "아, 그... 말씀은 드려볼게요."


 "고마워요, 지우씨! 그러면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요?"


 "어떤... 거요?"


 "할머니께서 다른 장류도 담그시나요? 된장이나 간장 같은거요."


 "고추장, 된장, 간장 다 담그세요. 참기름이나 들기름도 농사 지은 걸로 직접 짜서 드실 거예요."


 "역시. 그러면 하나만 더요. 매실로 만든 다른 건 없을까요?"


 "음... 있어요. 잠시만요. 집에 다녀올게요."


 지우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후다닥 마당을 가로지르더니 대문 밖을 빠져나갔다.


 "아니, 지금 당장 가지 않아도 되는데?"


 붙잡을 새도 없이 빠져나가는 지우를 보며 연우는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지우의 뒷모습을 좇던 진서가 연우를 향해 가볍게 눈을 흘겼다.


 "매실 농장 아들 티 내는거야? 지우 체하겠다."


 "지금 달라는 의미는 아니었어. 근데 진짜 맛있지 않아? 이 매실장아찌?"


 연우는 슬쩍 말을 돌리며 젓가락을 놀려 매실 장아찌를 입 에 넣었다.


 "얼른 가져왔으면 좋겠다고 얼굴에 써 있는데?"


 진서가 혀를 끌끌 찼다.


 "요리에 대한 열정이 강하네요, 연우씨는. 본가에서 매실 농장을 운영하세요?"


 세은이 티격대는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연우에게 물었다.


 "네. 여기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어요."


 "농장을 물려 받을 생각이에요? 아니면 음식 개발쪽?"


 "음식 개발이요. 매실로 뭔가를 해보고 싶어요. 요즘은 지역 특산물을 가공해서 판매하잖아요. 감자빵, 대게빵, 딸기빵, 술이나 잼이나 이런거요."


 "매실로 파는 것보다 좋을 수도 있죠. 상품이 좋다면."


 "그쵸? 요즘 자꾸 그쪽으로 욕심이 나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선보이고 싶어요. 지역 특산물도 알리고 싶고, 부모님 매실 농장 잘 되는 것도 좋고요. 제일 중요한 건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행복했으면 해요."


 연우의 눈에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세은은 그런 연우를 골똘히 바라보다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눈빛을 거울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에서.


 진서는 별말없이 연우를 응시했다. 또 시작이네 싶으면서도 유일하게 연우가 존경스러운 순간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 부럽기도 했다.


 매실 이야기가 한창일 무렵 지우가 옛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손에 든 양은 주전자가 묵직해 보였다. 연우가 재빨리 주전자를 대신 받아들었다.


 "이게 뭐야?"


 진서가 주전자를 가리켰다. 양은주전자 표면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매실차예요. 매실주스라고 해야하나? 할머니가 만든 매실액을 물에 탄 거예요."


 "그래? 맛있겠다. 매실차 좋아하거든."


 진서가 눈을 휘며 웃었다.


 "네가 안 좋아하는 음식이 있기는 하고? 지우씨 거기 컵 좀 들어줘요. 내가 따라줄게요."


 연우가 분주히 움직였다. 지우가 물컵을 하나씩 주전자 입구에 댔다. 연우가 차례대로 따르고, 지우가 컵을 나눠주었다.


 "시원하다. 이건 돈 주고도 못 사먹는 맛."


 진서가 매실차로 목을 축였다. 지우가 얼음까지 넣어온 매실차는 먹기 좋게 시원했다.


 "어?"


 연우와 세은은 거의 동시에 컵에서 입을 뗐다. 두 사람이 번뜩이는 눈빛을 마주했다.


 "맛이 진하네요. 적당히 달고, 물이랑 비율도 잘 맞고. 한 잔 더 마셔도 될까요?"


 연우의 말투가 진지했다.


 "네... 아직 많아요."


 지우가 양은주전자를 들자 연우가 손을 뻗어 주전자를 제 손으로 옮겨왔다.


 "내가 할게요."


 컵에 매실차를 따르고 주전자를 내려놓은 연우가 피식 웃었다.


 "근데 매실차를 얼마나 타온 거예요. 아직도 한참 남은 것 같은데요?"


 연우가 주전자를 좌우로 흔들자 매실차가 찰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서는 일주일은 마시겠어."


 진서가 놀리듯 말하자 지우의 귀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다같이 나눠 마시려면 얼마나 필요한 지 모르겠어서... 부족하면 안 될 것 같고..."


 지우가 민망한 듯 컵을 감싼 양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맞아. 부족한 거 보다는 넉넉하게 나눠 먹는 게 좋지. 그런 의미에서..."


 진서가 입가에 짓궂은 웃음을 맺었다. 컵을 입에 댄 채 촬영 중인 이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준과 눈이 마주치자 진서는 눈썹을 위로 까딱했다. 마실거냐는 물음을 용케 알아들은 이준이 눈가를 부드럽게 휘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진서는 시선을 돌리고 매실차를 벌컥 들이켰다. 요즘 들어 시도때도 없이 볼에 열기가 올랐다. 여름 내내 볕 아래 서 있던 탓일까. 저 남자 때문일까.


 진서가 손바닥으로 컵을 감쌌다가 시원해진 양 손을 볼에 얹으며 외쳤다.


 "잠깐. 그러면 후식타임! 떡도 하나씩 골라요."


 진서가 선물 받은 떡 상자를 열었다. 각각의 떡이 생화처럼 피어 있어 떡 상자가 작은 화단 같았다.


 "작품이네요, 이건. 와, 일일이 수작업해서 엄청 섬세하고요. 이러니 오래 걸려도 할 말이 없지."


 연우가 감탄하며 떡을 감상했다.


 "게다가 소원 같은 것도 들어준다며. 마케팅을 잘했네."


 진서는 떡을 만든 정성은 인정했지만 사람들이 sns에서 하는 말은 믿지 않았다. 소원을 들어주는 떡이라니. 그런 떡이 있을리가.


 "아니거든. 진짜 들어준댔거든."


 "이런 거 진짜 잘 믿어."


 연우가 발끈하자 진서가 눈을 흘겼고, 두 사람은 또 다시 투닥거렸다.


 "인증이 많아. 그쵸, 누님?"


 새참 먹는 동안 호칭을 정리한 연우가 세은의 동의를 구했다. 세은은 고개를 옆으로 까딱했다.


 "위약효과랑 비슷할 수도 있지만 주변에서 그런 일이 많기는 했다네요. 오래 기다렸던 아기가 찾아온다던가, 원하는 학교에 합격한다던가, 갖고 싶던 물건을 가지게 된다던가, 그런 일들이."


 연우가 진서를 향해 거 봐, 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 먼저 고를까요? 세은언니!"


 진서는 괜히 약이 올라 연우를 외면하고 세은에게 떡상자를 내밀었다.


 "집 주인한테 준 선물이니까 진서씨 먼저 골라요."


 "그럼 그럴까요?"


 진서가 너스레를 떨자 연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은근히 기대하고 있지, 공진서?"


 "선배는 맨 마지막에 고르시고. 다음은 세은 언니."


 연우는 떡 상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순서를 기다렸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손을 뻗었으나 진서의 손에 들린 상자는 공중에서 멈춰 있었다.


 "이준씨, 뭐 먹을래요?"


 진서의 장난을 눈치챈 이준이 멀리서 상자를 살폈다.


 "연두색 떡이요."


 이준이 떡을 고르자 연우가 카메라 쪽을 비스듬히 돌아보았다.


 "저놈이? 형을 버리고 공진서 장단을 맞추네?"


 "저놈이 뭐야, 감독님한테. 자, 이제 선배도 골라요. 내가 인심 쓴다."


 진서가 그제야 연우에게 떡 상자를 내밀었다.


 "치사하다, 치사해. 그래도 내가 먹고 싶은 건 남아있네."


 연우가 금세 싱글벙글하며 떡을 집었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연우의 시선이 노란색 꽃이 핀 떡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연우도 다른 사람들이 일부러 그 떡을 남겨둔 사실을 알았기에 멋쩍으면서 감사한 마음이었다.


 "아무리 봐도 작품이야."


 연우가 떡을 손바닥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돌려봤다.


 "소원 빌면서 꼭꼭 씹어 먹읍시다!"


 연우의 말에 사람들은 떡을 베어 물었다. 저마다의 염원을 마음에 품은 채.


 빨간 장미 모양의 떡을 고른 진서도 입안 가득 떡을 채워 넣었다. 소원이야 어쨌건 행복이 입안에 한아름 차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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