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진서는 지우가 선물한 조각보를 방문 대신 발처럼 드리웠다. 햇살이 조각보를 투과하며 옅은 빛을 뿌렸다. 진서는 한참 동안 취미방 앞에 서서 조각보가 내뿜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감상했다.
"정리할 게 산더미다. 감상은 여기까지."
진서는 조각보를 손으로 살며시 걷고 취미방으로 들어가 허리 높이의 원목 테이블을 들고 나왔다. 거실 벽면에 테이블을 붙인 진서는 바닥에 놓인 액자들을 이쪽저쪽 배치해 보았다.
"이건 여기. 이건 여기. 괜찮나?"
비슷한 크기의 액자 세 개가 테이블 위를 장식했다. 액자틀이 같은 두 개의 액자에는 진서가 부모님과 찍은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하나는 어린 시절에 찍은 가족 사진이고, 하나는 비교적 최근 가족 사진이었다. 모양이 다른 액자에는 진서 엄마의 독사진이 담겨 있었다.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찬 중년 여성의 모습이.
"엄마는 좋겠다."
진서가 엄마의 독사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빠가 찍은 엄마의 사진은 엄마를 가장 아름답게 담고 있었다. 어떤 사진가가 와도 아빠보다 엄마의 모습을 잘 담아낼 수는 없었다.
어떤 행위에는 말하지 않아도 감정이 담긴다. 아빠가 찍은 사진을 통해 배웠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동작은 똑같지만 동작을 행하는 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사랑이 눈에 보이는 순간이었나?"
아빠가 엄마의 사진을 찍어주던 기억이 진서의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아 있었다. 그날의 웃음과 부모님 사이에 흐르던 따스함. 그래서 액자 속 엄마의 모습이 더 아름다워 보일지도 모른다.
액자를 가만히 쳐다보던 진서가 움직이자 이준의 카메라가 진서의 걸음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내부 촬영을 마치고 두 사람은 마당으로 나와 잠시 촬영을 중단한 채 쉬었다. 툇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은 두 사람 사이에 진서가 내온 가벼운 다과가 놓였다.
"이거 볼래요?"
진서가 핸드폰을 이준에게 내밀었다. 이준이 고개를 기울여 화면을 응시하자 진서가 영상을 재생시켰다. 영상에는 용미포 길고양이인 흰 양말이 등장했다. 입에 빨간 장미꽃을 물고 걸어오는 모습이 꽤 도도했다.
"검은 턱시도 입고, 입에 빨간 장미 물고, 춤추자는 것 같죠? 살다가 꽃 물고 오는 고양이는 처음 본다니까요."
영상 속에서 흰 양말은 툇마루로 올라오더니 빨간 장미를 고스란히 내려 두었다. 뒤이어 진서의 웃음 소리가 듣기 좋게 녹음되어 있었다.
영상이 멎자 진서가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진서에게서 장미향이 흘러나오는 듯해서, 기울었던 이준의 상체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저번에 쥐를 물어다 놨어요. 디딤돌 아래다가 가지런히. 얼마나 놀랐는지. 소리 질렀잖아요. 지우가 달려 왔다니까요?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가 깜짝 놀랐대요."
이준의 시선이 문장을 따라 풍부하게 변하는 진서의 표정에 머물렀다. 진서의 헤어라인을 따라 흐르는 잔머리를 늦여름의 바람이 잔잔히 흔들었다.
"쥐는 어떻게 했어요?"
이준이 차마 손은 뻗지 못하고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덜덜 떨면서 묻어줬어요."
진서가 뒤뜰을 가리키고는 삽으로 묻는 시늉을 해 보였다.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자세가 제법 야무졌다.
"다음날 흰 양말이 왔길래, 고맙지만 쥐는 안 물어와도 된다고 말했거든요? 근데 알아들었나 봐요. 이제 꽃을 물어오더라고요. 한 번이면 우연인가 할 텐데 벌써 세 번째예요."
"비슷한 얘기 들어봤어요. 고양이가 장갑이나 양말을 물어오는 얘기. 근데 장미를 물어오다니. 꽤 로맨틱한 녀석이네요."
"흰 양말이 영리하죠?"
진서가 뿌듯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쳐다봤다. 이준은 진서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꽃을 물고 대문을 넘어 사뿐하게 걸어오는 흰 양말을 발견했다. 흰 양말은 익숙하게 마당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저기 오네요. 흰 양말. 사진 찍어볼래요?"
이준이 툇마루에 내려두었던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이준씨 카메라로요?"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려던 진서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별로 안 어려워요."
"사진은 핸드폰으로 밖에 안 찍어봤는데. 아, 옛날에 디카로는 찍어봤네요. 디카 알죠?"
"당연히 알죠. 우리 나름 같은 세대잖아요."
"요즘은 너무 빠르게 바뀌어서 3년 차이면 딴 세상이잖아요. 혹시 모를까봐 물었어요. 조금 느렸던 그때를 공유해서 다행이네요. 그래서 이 큰 카메라는 어떻게 찍나요?"
"3년 차이면 별 거 아니죠. 잠깐만요."
이준이 카메라 초점을 흰 고양이에 맞추고, 진서가 찍기 편하게 자동모드로 설정을 변경했다. 찰칵하는 셔터소리가 연사로 여러번 울렸다.
"여기요. 부담 갖지 말고 찍어요. 찍기 편하게 해놨어요. 화면 보면서 오른손 검지로 셔터 누르면 되고, 왼손으로 줌만 조절해요."
"줌?"
"잠깐 실례할게요."
이준이 어정쩡한 진서의 왼손을 잡아 줌을 조절하기 편하게 해주었다.
"줌을 왼쪽으로 돌리면 멀리 있는 걸 가깝게 찍을 수 있어요. 흰 양말이 가깝게 다가오면 줌을 조금씩 오른쪽으로 돌리면 돼요."
"우와. 멀리 있는데 엄청 가깝게 보이네요. 전문가용 장비라서 그런가."
뷰 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댄 진서는 들떠 있었다.
"대신 손은 안 떨리게. 잘 받치고 찍어야 해요. 한 번 누르면 여러 장 찍히게 해놨어요. 편하게 셔터 눌러봐요."
진서의 검지 손가락이 셔터를 누르자 촤라락 하는 셔터음이 연속으로 울렸다.
"이 소리 마음에 들어요. 소리가 전문가 같달까?"
"이제 줌을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려봐요."
"오른쪽으로."
"확 당기지 말고 천천히, 살살 돌리면 돼요."
이준이 진서를 도와 살짝 줌을 당겨주었다. 줌 위에서 어색하게 움직이던 진서의 손이 이준의 도움으로 안정감을 찾았다.
툇마루에 훌쩍 뛰어오른 흰 양말은 진서와 조금 떨어진 곳에 얌전히 꽃을 내려놓았다. 연신 사진을 촬영하던 진서가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흰 양말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어느새 이준은 마당에 서서 진서의 모습을 영상에 담고 있었다.
흰 양말은 할 일을 마쳤다는 뜻인지 몸을 쭉 펴더니 그늘에 자리를 잡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흰 양말이 몸을 웅크리는 모습까지 사진에 담은 진서가 이준에게 카메라를 내밀었다.
"흰 양말이랑 사진 한 장만 찍어 줄래요?"
"얼마든지요."
이준은 영상용 카메라의 각도를 맞춰 설치해두고 진서가 건넨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진서는 흰 양말이 가져온 장미를 귀에 꽂았다.
"예쁘게 찍어줘요."
진서는 장미꽃이 잘 보이도록 옆으로 앉아 흰 양말을 바라보았다.
마침 빛이 좋은 시간대였다. 툇마루에서 잠을 청하는 고양이 한 마리와 고양이가 가져온 장미꽃을 귀에 꽂은 진서, 그리고 그들을 품고 있는 옛집까지. 하나로 어우러진 여유로운 풍경을 사진에 담아내는 이준의 손이 바빴다.
"이제 그만 찍어도 돼요. 작가님이 몰입하셨네. 으하하."
불현듯 쑥스러워진 진서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가요? 사진이 잘 담기네요. 예뻐요. 다."
"예쁘다는 말에 나도 포함되어 있는 거죠? 으하하. 대답은 말아요. 그렇게 믿을래. 내가 찍은 사진 볼 수 있어요?"
"바로 보여줄게요."
이준이 웃음을 머금은 채 카메라를 조작했다.
"여기 누르면 옆으로 넘어가요."
"요즘은 카메라도 다 터치구나. 우와, 이거 진짜 잘 나왔다. 아, 이건 좀 많이 흔들렸네요. 이건 진짜 잘 찍었다. 이준씨, 이거 봐요. 나름 잘 찍었죠?"
진서가 이준에게 자랑하며 카메라를 내밀었다.
"구도가 좋네요. 흰 양말도 예쁘게 담겼고."
칭찬에 으쓱하던 진서는 다시 카메라를 가져와 이준이 찍은 사진들을 구경했다.
"이준씨가 찍어준 사진은 더할 나위 없이 잘 나왔네요. 흰 양말 사진이랑 내 사진이랑 잘 나온 거 몇 장만 보내 줄래요?"
"지금 골라서 바로 보내줄게요."
"바로? 컴퓨터 연결하고 그런 거 아니에요?"
"요즘은 바로 다 돼요."
"세상 좋아졌네. 카메라가 거의 스마트폰인거죠? 근데 우리 아빠는 왜 옛날 카메라만 쓰시는 걸까요? 이참에 생신선물로 카메라를 사드려야 하나."
"필름 카메라는 필름 카메라만의 감성도 있고, 오래 쓰셨으면 손에 익어서 그러실 수도 있어요."
"이준씨도 그런 카메라가 있어요?"
"애착 가는 카메라가 있기는 해요. 교감이 되는 카메라가 있거든요. 일 할 때 쓰기는 어려운데 개인적인 일로 촬영할 때는 찾게 돼요. 추억도 많이 담겨 있고."
"아빠가 쓰는 카메라도 그런 것 같네요. 기능은 모르겠지만 추억이 많이 담기긴 했거든요. 이준씨 말 들으니까 카메라 말고 다른 거 선물해 드려야 겠어요. 사진 보내주고 있어요. 난 수박 잘라 올게요. 엄청 시원할 걸요? 어제 저녁부터 냉장고에 넣어 뒀거든요."
진서가 수박을 내오는 사이 이준은 잘 나온 흰 양말의 사진을 골랐다.
"수박 왔어요."
진서가 툇마루에 앉으며 쟁반을 내려 놓았다. 하얀 그릇 위에 삼각형으로 잘린 수박이 탐스럽게 빨갰다.
"잘 먹을게요. 사진은 메시지 보내뒀어요."
"벌써요? 고마워요. 수박 먹으면서 또 봐야지."
수박은 달고 시원했다.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낮잠을 다 잔 흰 양말은 다시 용미포를 배회하러 떠났다.
"뒷통수에 500원 만한 구멍 나봤어요? 눈물 나거든요. 내 소중한 머리카락. 가뜩이나 30대 되면서 머리숱 줄어드는데."
진서는 원형탈모가 생겼던 뒷통수를 손날로 문질렀다. 주변의 머리카락에 비하면 아직도 짧았지만 휑했던 구멍은 채워져 있었다.
"휑한 두피를 만질 때마다 이게 사는 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싶었어요."
"도시의 하루는 쉴 틈 없이 돌아가죠. 화려하게 반짝이면서도 온통 잿빛으로."
"화려하면서 잿빛인 거, 모순적인 말이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그래서 이준씨가 찍은 사진이 그랬나? 으하하. 인터넷에서 사진 찾아 봤거든요. 다른 건 잘 몰라도 색감 차이는 확연하던데요. 용미포에 오기 전후 작업이."
"도시에 살 때는 대부분 모노톤 작업이었죠. 마음 따라서 그랬는지."
"난 자연의 색감이 그리웠어요. 어렸을 때 시골을 들락거린 경험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서 그런가봐요. 처음부터 도시 살았으면 용미포라는 선택지는 없었을걸요. 이준씨는 이런 환경에서 살아본 적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도시에 살았어요. 작업도 주로 도시에서 했고."
"용미포는 어쩌다 왔어요, 그럼? 연고도 없는데."
"바다에 뜬 구름 한 조각이 예뻐서요."
"에이, 설마. 계획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나보다 무모한 성격인가?"
진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시는 익숙하면서도 늘 낯설었어요. 하늘 한 번 쳐다볼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잖아요. 그러다 어느 순간 사람들의 치열함에 질렸고. 돌아보니 내 삶까지 불타서 재로 변하고 있는 느낌? 남은 건 나빠진 건강과 기대에 못 미치는 통장 잔고 뿐이고."
"으하하. 뭔지 알아요."
"도시에 살다가 시골집 고치는 거, 힘들지 않았어요?"
"힘들었어요. 근데 도시에서 힘든거랑 달라요. 오롯이 나를 위해 일하면서 땀 흘리는 기분이라서. 결과물도 내꺼고. 이준씨는 사진 작업하고 나면 작품이 남지만 나 같은 직장인은 애매하거든요. 내가 한 건 맞지만 열심히 하고 좋은 성과를 내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나 싶고. 나는 언제든 바꿀 수 있는 부품이라는 불안감도 있고."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달랐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껴봤기에. 진서가 봤다던 모노톤의 사진에도 그런 감정이 들어 있을 것이다.
"여유가 필요했어요. 안정감도 필요했고."
진서가 툇마루를 팔로 짚어 상체를 받치고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그래서 천천히 하자, 서두르지 마, 이런 말을 많이 하는 거예요?"
"맞아요. 언어 습관부터 바꿔보려고요. 전에는 빨리 끝내야 된다는 말이 습관이었어요. 할 일이 많기도 했고, 할 일이 없어도 빨리 끝내 놓아야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뭐에 그렇게 매번 쫓기고 불안한지."
"여기서는 괜찮아요?"
"절대 게으를 수 없는 환경이지만 적당한 분주함이라 좋아요. 해 뜨면 눈 뜨고, 해지면 잠자고. 최소한 건강을 잃을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으하하."
호탕하게 웃은 진서의 얼굴에 따스한 기운이 번졌다.
"요즘은 주변을 둘러보는 일이 재미 있어요. 여유가 생겨서 그런 건가. 자연도 돌아보고, 사람도 돌아보는데 각자의 멋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근사해요."
"용미포에 와서 처음 생각했어요. 대단한 사람이 대단하기보다 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단하구나. 근데 자연은 사람보다 더 성실히 사는구나."
"맞아요. 살아있는 것들이 다 대단해 보여요. 징그럽기는 하지만 뚝딱뚝딱 거미집 짓는 거미도 존경스러워요. 하루하루 색이 짙어 지는 나뭇잎도, 볼 때마다 모양을 바꾸는 구름도 다 멋있어요. 이래서 이준씨가 구름에 반했나?"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이준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다리를 까딱이며 구름 구경하는 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용미포 바다의 내음을 옛집에 내려놓은 바람이 이번에는 구름의 모양을 빚어내고 있었다. 뭉게구름이 뭉실뭉실 파란 하늘 위를 떠다녔다. 이준이 용미포에 반했던 그날처럼.
그날 밤, 이준은 진서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다큐 영상을 편집했다. 점차 모습을 갖춰가는 옛집 곳곳에 진서의 손길이 더해지고 있었다. 사다리에 올라 서까래를 그라인더로 갈아내는 진서, 천장에 흙을 바르는 진서, 반장님과 대화를 나누는 진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도 으하하 웃는 진서가 차례대로 스쳤다. 모니터 안에서 다채롭게 활동하는 진서를 보며 이준의 입꼬리도 저절로 올라갔다.
이준이 한창 영상에 빠져 있는데 책상 위에 올려 둔 스마트폰 액정의 불빛이 번쩍였다. 천이선, 세 글자가 액정에 떴다. 드문 전화였다. 이준은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보다 손을 뻗었다.
"왜?"
"이번에 우리 드라마 잘 됐어."
다짜고짜 맥락없이 들어온 말이었다. 이미 형에게 축하 메시지도 보냈는데 따로 연락이 왔다. 무려 전화로. 다른데 꽂혀서 전화한 게 분명했다.
"응. 드라마 끝난 지 한 달도 넘었는데 화제성 지속되기 어렵지. 근데 그걸 해내네."
이준은 형의 모습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눈에 힘을 팍 주고,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핸드폰을 손으로 꽉 쥐고 있는, 흥분했을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습관이라고 하니 진서의 습관이 떠올랐다. 천천히 하자, 서두르지 마, 하는.
"무슨 일인데?"
"유튜브 봤지? 용미포, 거기."
"형도 봤어?"
형의 말에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영상 촬영한 곳 가까워?"
"가까우면, 왜?"
스마트폰 너머에서 훅,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찰거머리 형이 발동을 걸고 있었다.
"가깝구나? 영상에 나오는 그 사람 누구야? 윤한별. 아는 사이야? 용미포가 그렇게 큰 동네는 아니잖아. 아마 알겠지? 어려보이던데 나이는 몇 살? 학생이야? 성격은?"
숨도 쉬지 않고 와다다 쏟아내는 말에 이준은 핸드폰에서 귀를 살짝 뗐다. 형은 원래부터 말이 많고 빠르기로 유명한데 못 본 사이 랩을 배웠나 보다. 발음도 좋아졌다. 문장에 리듬감은 왜 생긴걸까.
"한별이?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만 친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해."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댄 이준이 무심하게 답했다.
"윤한별을 한별이라고 부르는 거면 친한 거지."
이준이 세운 방어벽은 이선의 한 마디에 무참히 깨졌다.
"왜 그러는데?"
"게스트 하우스 스태프라며. 아르바이트생? 아니면 뭐 잠깐 살면서 도와주는 그런 건가? 언제부터 거기서 일한 거야? 실물은 어때? 하긴 무슨 상관이야. 이미 괜찮은데."
이선이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쉴 새없이 질문을 하더니 자문자답까지 쏟아냈다.
"용건만."
이준이 가볍게 형의 말을 끊었다. 그렇지 않으면 두 시간이 간다.
"탐 나. 지금 찾고 있는 캐릭터에 기가 막히게 어울려. 어때? 답이 됐어?"
이준이 피식 웃었다. 하는 말은 캐릭터에 어울린다는 말인데 느낌은 소개팅 시켜 달라는 제안 같았다.
"답은 됐는데. 할까, 그 친구."
"그건 걱정 말고. 얘기나 한 번 해 봐. 나는 내일 바로 용미포에 내려갈 생각이니까."
"얘기해 놓으라면서 말할 시간도 안 줘?"
"급해. 급해. 급해. 급하다고. 딱 찾던 이미지야."
"어차피 내일은 안 돼. 그 친구 없는 날이야."
이준은 한별을 위해 나름 선의의 거짓말을 해주었다. 형이라면 한별을 설득할 확률이 높았다. 다만 이준은 한별에게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럼 모레. 모레는 반드시 자리 마련해 줘."
"말은 해 볼게. 끊는다."
정신없는 통화를 마친 이준은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내려 두었다. 형의 메시지가 연달아 날아들었다. 꼭 말해, 반드시 말해, 같은 메시지라 슬쩍 눈길을 주고 말았다.
턱을 괴고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던 이준은 영상 속에서 환히 웃는 진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준의 손이 다시 핸드폰을 쥐었다.
기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 우연처럼, 때로는 운명처럼.
이준의 양쪽 엄지 손가락이 핸드폰 액정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진서씨. 한별이 번호 알아요?]
액정에 새겨진 짧은 문장을 꼼꼼하게 확인한 이준이 메시지를 전송했다. 일과 관련 없는 사적인 메시지는 처음이었다.
평소와 달리 금방 답장이 왔다. 이준은 빠른 답장에 놀라며 메시지를 열었다.
[형. 내 번호 알잖아요? 히히. 비밀인걸로.]
한별이었다. 아마도 진서가 한별에게 연락한 모양이었다. 눈치 빠른 윤한별. 모른 척 도와줘서 다행이다. 한별에게는 파밀리에에서 밥을 사며 형의 이야기를 전달해야겠다.
곧이어 또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윤한별 010-****-****.]
이번에는 기다리던 진서의 답장이었다. 어떻게 대화를 이어갈 지 말을 고르는데 메시지가 하나 더 이어졌다.
[무슨 일 있어요?]
이준은 침대 위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스마트폰 화면 위에서 양쪽 엄지 손가락이 분주히 움직였다.
[뭘 잘못 건드렸는지 한별이 번호가 지워졌어요. 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상황을 설명하면서 둘 사이에 계속 메시지가 오갔다. 진서는 한별이 얻게 될 기회를 환영하는 눈치였다. 한별과 관련된 이야기가 끝난 후에 이준은 하나의 메시지를 더했다.
[용미포 뜻 알았어요.]
[뭔데요?]
진서가 바로 흥미를 보였다. 이준은 마을회관에 가서 어른들께 들은 내용을 되짚으며 메시지를 작성했다.
[용의 눈썹이요.]
[눈썹이요? 용도 눈썹이 있나?]
[전설에 따르면 있나 봐요. 용미산 계곡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면서 눈썹 한 올을 떨어뜨렸대요. 그 눈썹이 떨어진 곳에 나무 한 그루가 자랐는데 7일만에 아름드리 나무로 컸고요. 사람들이 그 주변에 마을을 짓고 용미포라고 이름 붙였대요.]
[설마 그 당산나무?]
[그 느티나무요.]
[내일 자세히 봐야겠어요. 나무랑 같이 촬영할까요?]
[좋은 생각이에요.]
[이제 자야겠어요. 벌써 2시야. 이준씨도 얼른 자요.]
[잘자요.]
마지막 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서도 이준은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길게 늘어진 대화창을 몇 번이나 다시 읽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