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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성화 Aug 29. 2022

용미포 옛집

8. 일상의 추억(1)

 "뭐야."


 악, 악, 하면서 괴성을 내짖는 소리에 진서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렸다. 창밖은 아직 컴컴했다.


 "왜 저래. 밤새 마셨나?"


 진서가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어떤 사람이 부리는 객기인지 고성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이어졌다.


 "술을 마셔도 곱게 마실 것이지. 진상."


 진서는 여름용 얇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몇 번의 괴성이 반복되다 멀어지듯 소리가 흐려졌다. 틈새에 진서는 다시 잠이 들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진서의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왔다. 눈을 감고 있어도 햇살의 기운이 느껴졌다.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김없이 6시 30분일 테니. 용미포 옛집에 울리는 새소리 알람은 정확했다.


 "으으."


 진서가 침대에 누운 채 팔과 다리를 쭉 늘였다. 새소리를 들으며, 밝아진 햇살을 느끼며, 자연의 흐름에 따라 일어난다. 알람 소리에 억지로 일어나던 생활과는 결이 달랐다.


 침대 하나 달랑 놓인 안방은 단출했다. 이부자리를 정리한 진서는 붙박이장 문을 열어 파란 원피스를 꺼냈다. 새 집이 완공되면 입으려고 용미포장에서 사 둔 옷이었다. 화려한 꽃무늬 일색의 옷 사이에서 단색의 파란 원단이 눈에 띄어 구매해 두었다.


 큰 일을 앞두고 목욕재계 하듯 정성껏 씻고,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서 진서는 파란 원피스를 갖춰 입었다.


 "좋은데?"


 진서가 화장실 거울에 옷을 이리저리 비춰보고 주방으로 향했다.


 전기포트가 뿌연 김을 내뿜었다. 여름이라 찬 음료를 많이 먹지만 아침에는 따뜻한 물을 마셨다. 머그잔에 물을 붓고 복자 할머니가 주신 매실청을 두 숟가락 넣었다. 휘휘 젓는 찻 숟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새콤달콤한 향이 풍겨왔다.


 거실 탁자 앞에 앉아 진서는 물끄러미 완성된 집을 둘러보았다. 처음 왔을 때의 막막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곳곳에 지난 시간의 추억들이 담겨 있었다.


 안방에는 침대와 옷장, 주방에는 기본 조리기구와 살림살이들, 작은 방은 서재로 각자의 몫을 해내고 있었다. 아직 비어있는 곳은 창문을 크게 새로 낸 취미방 뿐이었다.


 "취미라... 뭐가 좋을까."


 용미포에 오기 전에는 취미라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경험을 해보고 체험을 해봐야 취미도 생기고, 취향도 생길텐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오직 일, 일, 일. 일 뿐이었다. 일만 하다 죽고 싶지 않았는데 살려면 일을 해야 했다.


 대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용돈을 충당했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다. 4학년 때 인턴으로 들어간 기업에 최종 합격했으니 졸업 전부터 출근했다. 출퇴근길만 왕복 3시간. 주 5일 동안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 시달리며 주 6일 근무하던 시절에 경의를 표했다. 자취를 하고 싶었지만 회사와 가까운 곳은 집값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회사에서도 하루에 두 세 시간씩 출퇴근에 쓰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어떻게 다녔지."


 진서가 찻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집에 와서 씻고, 잠자기도 바빴다. 하루가 느리면서도 빠르게 지나갔지만 집에 도착한 이후의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매일이 같은 풍경이었지만 힘들고 피곤해도 운이 좋은 나날이라 여겼다. 뒷통수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기 전까지는.


 부분 탈모가 왔을 무렵 할머니의 연락을 받았다. 용미포의 옛집을 물려받을 생각이 있냐는 전화였다. 일주일을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진서는 스마트폰에서 가계부 앱을 열어 그간의 지출 상황을 정리했다. 화면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던 진서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미친. 숨만 쉬어도 돈 나가."


 낭비나 사치도 없는데 예상보다 금액 지출이 컸다. 리모델링 비용도 처음 생각한 것보다 많이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가계부 어플을 끄고 핸드폰을 탁자 멀리 밀어버렸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았구나, 공진서."


 진서가 바닥에 길게 누웠다.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며 생활비를 충분히 보탠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턱없이 부족한 용돈을 받으면서 부모님이 거둬 주신 거였다.


 맥이 풀려 몸이 늘어졌다. 도시에서 자취를 하는 또래의 직장인들은 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누워 있기만 해도 모두의 통장에 돈이 충전되면 좋을 텐데. 무선 충전기에 올려 놓은 스마트폰처럼.


 "먹고 살 수 있겠지?"


 쓸데없는 상상의 끝에 현실적인 고민이 들이 닥쳤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무선 충전기에도 전기가 흘려야 충전이 가능한 것처럼.


 진서는 내용물이 반쯤 남은 머그잔을 들고 툇마루로 자리를 옮겼다.


 "예쁘긴 예쁘네. 출혈은 컸어도."


 앞마당은 흡족하게 바뀌어 있었다. 마을 어르신께 부탁해 트랙터로 마당을 갈아엎고 구들장에서 나온 돌을 깔았다. 구들장 돌을 깐 사이마다 생긴 틈새는 파쇄석을 깔았다. 텃밭을 조성하고 나니 잔디 관리를 할 엄두가 안 났다. 잡초는 정말이지 잡초다.


 대신 작은 화단을 만들었다. 대문에서 들어오면 마당 왼쪽편이다. 꽃은 노란 해바라기 세 송이만 심었고 나머지는 허브가 자리를 차지했다. 바질페스토와 마르게리따 피자를 만들기 위해 바질을 잔뜩 심었고, 애플민트와 로즈마리는 조금씩 심었다. 허브는 놔두면 알아서 잘 큰다는 말에 혹한 마음도 있기는 하다. 화단을 가꾸기는 천천히 해야지.


 "원예?"


 아직 확고하게 취미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흥미롭기는 했다. 앞으로 웹툰의 소재로 삼기에도 좋았다. 집 고치는 과정을 먼저 웹툰으로 그리겠지만.


 화단 옆에는 수돗가가 있는데 그 옆에 단을 높여서 종아리 절반 높이의 장독대를 몇 개 두었다. 아직은 장식용이지만 내년에는 고추장, 된장, 간장같은 장류를 담을 예정이었다. 복자 할머니네 집에서 담기로 약속해 두었다.


 마당 오른쪽은 화덕과 평상 자리였다. 화덕과 평상 아래에도 파쇄석을 깔아 두었다. 담장과 평상 사이에는 은행나무도 심었다. 아직 1미터 밖에 안 되는 묘목이었다.


 "마을 당산나무만큼 크려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할까."


 진서는 손을 내밀어 손바닥에 햇빛을 쬐었다. 처음 용미포에 왔을 때보다 햇살은 한 꺼풀 깊어져 있었다. 멀리서 휘파람새가 고운 소리를 뽐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머릿속을 채운 질문은 하나였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하루는 갑자기 숨이 안 쉬어졌다. 병원에 가서 확실한 답을 받아왔다. 번아웃 증후군. 예상 못한 습격이었다. 알고 보니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증후군이란다.


 벌 줄만 알고 쓸 줄은 모르는 삶이었다. 미래가 불안해서 한 푼이라도 더 모으고 싶었다. 남들이 욜로와 플렉스를 외칠 때도 굳건했다. 그러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훌렁 빠져버린 머리카락처럼 순식간에. 욜로도, 플렉스도, 절약도, 다 부질 없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 삶의 균형을 맞춘다."


 진서는 천천히 문장을 내뱉으며 차분히 심호흡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선물해 주신 시집 첫 장에 적혀 있던 글귀였다. 가빠오던 호흡이 차분하게 가라 앉았다.


 휴식을 모르고 몸과 정신을 갉아먹는 일이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그 지경이 되고서야 되돌아 봤다.


 열정적으로 달리지 않는 삶은 전부 뜨뜻미지근한 그저 그런 인생일까?


 열정적으로 살아야 하는 줄 알았지만 삶이 과열 상태였다. 그만큼 일하지 않아도 됐었고, 그만큼 매달리지 않아도 됐었다. 무작정 그래야 하는 줄 알고 그저 했을 뿐이다. 그렇게 불태우다 보니 더 이상 뜨거운 온도를 만들어 낼 연료도 없고, 그 온도를 견뎌낼 내구성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뜨뜻미지근한 정도가 내게는 가장 적절한 온도라는 것을. 왜 더 가슴 뜨겁게 살지 못하냐고, 열정적으로 살지 않냐고 윽박지르는 세상의 소리에 억지로 열을 내고 있었다.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아니었는데 억지로 쥐어 짜내고 있었으니 탈이 날 수밖에.


 뜨뜻미지근한 삶이 잘못된 건 아니다. 누군가는 시끌벅적한 장소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조용한 공간을 좋아하듯이 사소한 차이였을 뿐이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괜찮지 않을까. 조금 천천히 돌아가는 일도,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살아가는 삶도. 행복은 결국 나답게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데서 올 테니까.


 진서가 미지근한 매실청 차를 다 마시고 툇마루에 머그잔을 내려놓는데 대문으로 이준이 들어왔다. 이준의 시계도 용미포 새들처럼 정확하다. 진서는 시계를 보지 않아도 지금이 약속 시간 5분 전인 9시 55분이라는 걸 알았다.


 "왔어요? 이준씨? 마실 거 줄까요?"


 "괜찮아요. 커피 마시고 왔어요. 잠은 잘 잤어요?"


 "반은 잘 자고 반은 못 잤어요."


 이준이 무슨 뜻이냐며 눈으로 물었다.


 "오늘 새벽에 누가 술 취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아, 그거 고라니 울음소리에요."


 "설마? 사람 소리였는데? 악, 악, 하면서?"


 진서가 어설프게 고라니 울음소리를 따라하자 이준이 크게 웃었다.


 "앞으로도 간혹 들릴 거예요. 고라니가 가끔 출몰하거든요."


 "살면서 들은 동물 울음소리 중에 제일 멋없고, 괴상하고, 황당해요. 어후, 충격적이야."


 "원래 처음 들으면 다들 놀라요."


 이준이 싱긋 웃으며 갈색 종이로 포장된 네모난 물건을 건넸다.


 "집들이 선물이요. 약소하지만."


 "지금 풀어봐도 돼요?"


 "그럼요."


 이준의 흔쾌한 답에 진서가 갈색 종이 포장지를 뜯었다. 손보다 조금 큰 크기의 액자였다. 액자에는 흰 양말과 진서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진서는 사진을 더 가까이에서 살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몽글몽글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사진 좋네요."


 진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머리에 장미꽃을 꽂은 얼굴이 행복해보였다. 아빠가 찍어준 사진 속 엄마의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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